봄
세종 10년의 봄. 들녘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생기가 돌았으나, 남행길에 오른 어가 안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했다. 왕세자의 병세가 호전되어 조정이 한숨을 돌린 틈을 타, 대왕의 어가는 도성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죽산의 선비 안망지의 사저였다.
어가는 흔들림 없이 나아갔고, 왕의 시선은 맞은편에 단정히 앉은 차녀, 정의공주에게 머물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식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비인 세종은 이 여식의 혼인을 미끼로 한 사내의 날개를 꺾으려 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지 아느냐?"
"선비를 거두러 가시는 것 아니신지요?"
"그래, 오늘 아비의 대업을 감당할 사람을 거둘 것이다."
왕의 낮은 음성에 공주는 고개를 숙였다. 대왕이 평생을 품어온 대업. 그 거대한 판을 짜기 위해, 언어와 음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를 왕실의 곁에 묶어두어야 했다. 어설픈 벼슬을 내리면 조정 대신들의 견제와 사대부의 당쟁에 휘말려 대업을 갉아먹힐 터였다. 가장 완벽한 감옥이자 가장 든든한 요새는 바로 '부마(왕의 사위)'라는 자리였다. 공주는 자신이 대업을 위한 가장 화려한 덫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덫에 걸릴 사내만큼은, 껍데기가 아닌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기를 바랐다.
죽산 안망지의 사저는 지방의 저택이라 믿기 힘들 만큼 기품이 넘쳤다. 대청마루에는 정교한 사군자 병풍이 둘러쳐 있었고,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침향이 봄바람을 타고 마당의 매화향과 섞여 은은하게 번졌다. 대청 한가운데, 동재에 마련된 상석 아래로 고을의 사대부들이 숨을 죽인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주실이 울고 있었다.
티 없이 맑은 옥색 학창의를 입고 검은 복건을 쓴 소년 문사, 안맹담. 열일곱의 앳된 태가 남았으나, 거문고의 현을 짚는 그의 손끝에는 늙은 악공조차 흉내 내지 못할 심연이 깃들어 있었다. 의학은 물론, 뭍 선비들이 평생을 바쳐도 닿기 힘든 심학(心學)의 경지까지 통달했다는 죽산 안씨 명가의 후계자. 그 절묘한 음률 앞에서 사람들은 그저 넋을 잃었다.
정의공주의 시선이 소년의 곧은 콧날과 단단한 어깨에 멎었다. 서늘했던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박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 사내다. 저 사내라면 기꺼이 나의 부군으로 맞이하리라. 하지만 그 순간, 공주의 가슴 한편이 찌르듯 아파왔다. 저토록 찬란한 재주를 가진 사내를 가지려면, 부마라는 금제(禁制)를 채워 관직으로 나아갈 입신양명의 길을 영원히 끊어내야만 했다. 탐이 나면서도 미안한, 그 지독한 모순이 공주의 입술을 깨물게 했다.
그때였다. 공주의 예리한 감각이 또 다른 시선 하나를 짚어냈다.
안채의 사대부 여인들 틈에 섞여 있는 명가의 규수, 한선이었다. 수수하지만 기품 있는 연옥색 치마를 입은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안맹담을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는 아주 오래된 애정과,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우아함이 서려 있었다. 안맹담 역시 연주를 하면서도 시선의 끝은 미세하게 한선이 있는 안채 쪽을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타인은 범접할 수 없는 세월의 언어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정의공주의 손이 치맛자락을 소리 없이 움켜쥐었다. 아주 짧은 순간 아리따운 규수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여유 같은 것일까. 공주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한선의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사대부 여인들이 황망히 예를 갖추며 청자 찻잔을 올렸다. 공주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설차의 향을 가볍게 불어내며, 남은 호흡에 서늘한 질문을 실어 던졌다.
"어느 집 규수이냐?"
"공주자가, 한림학사 한청천의 여식입니다."
"그래, 저 도령을 잘 아느냐?"
한선은 찻잔을 받쳐 든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 자주 아버님을 따라 이 집에 드나들어 낯이 익나이다."
'자주'라는 단어에 힘이 실리자, 공주가 닿지 못했던 소년과의 시간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그 한마디가 공주의 가슴에 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향리에 뛰어난 문사들이 많나 보구나."
"뛰어난 이가 뛰어난 이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공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서로가 낭중지추 아니겠니"
주머니에 송곳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라... 한선의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정의공주의 웃음소리는 봄꽃처럼 화사했으나, 그 온도는 겨울비처럼 차가웠다. 권력을 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한선은 옷고름을 꽉 쥔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이의 뛰어난 재주는 후일 사서에 드높일 만 하나이다."
"사서에 드높일 만 하다라..."
일순 공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부마가 되면 사서에 이름 석 자를 정치적으로 남길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한선이 상기시킨 것이다. 공주도 선비라면 선비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지켜주고 싶었다.
"이 고을에서는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한선은 공주의 심기가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고을을 내세웠다. 공주의 손끝이 찻잔 테두리에서 멈췄다. 한 사내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내야 한다는 죄책감을, 이 향리의 규수가 정확히 후벼 파고 있었다. 공주는 미소를 완전히 지운 채 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재주를 펴지 못한다면 실망이 크겠구나?"
공주의 질문은 한선을 향하여 묻는 것인지 한 고을을 향하여 묻는 것인지 모호했다.
"그렇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공주에게는 마치 한선의 대답이 자신이 문사의 앞날을 막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는 의미처럼 다가왔다.
"마땅하고 말고..."
정의공주는 마땅하고 말고에서 말을 멈추었다. 마땅하고 말고를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지금 저 문사에게 마땅한 일은 충일 것이다. 사사로이 마땅한 일을 마땅하지 않게 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폭력일 것이었다. 한선은 말꼬리를 흐리는 공주를 보며 연민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 화들짝 놀랐다.
"젊은 처자가 한숨이니..."
정의공주는 아름다운 연적을 앞에 두고는 웃음을 지었다.
"황공합니다."
"마땅하고 말고는... 쉬우면서 어려운 말이구나."
"쉬운 이들에게 너무 쉽게 마땅하기에 어려운 것이 아닐 런지요?"
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쉬운 이는 없단다. 쉬워 보일 뿐..."
공주의 아릿한 마음이 전해져서 한선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고 찻잔을 기울였다.
정의공주는 한선을 건네다 보며 대왕을 부추겨서 문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리라 마음먹었다.
선비의 이름이 사서에 남는 것이 대업을 온전히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자라면 필시 속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규수에게 미안한 일 따위 안해도 될 테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면 이 규수에게 더욱 미안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