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제의 무녀 사야 #1. 카이바기

원한의 씨앗

사비성.

여름밤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늦은 시각,

성벽 아래 군영은 숨을 죽인 채 숯처럼 타들어갔다.


총군장의 막사 앞에는 횃불이 바람에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전도는 적을 표시한 빨간 깃의 바늘로 뒤덮여 있다.

장막 안은 묵직한 침묵으로 감돌았다.


총군장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메마르다 못해 갈라졌다.

“카아바기 대군장, 황산을 지키라.”


마루 위에 무릎을 세운 카이바기가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말을 고르다, 입술을 열었다.

“얼마나 버티면 됩니까?”


총군장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한 눈빛 속엔 미안함이 드러나 있었다.

“이틀... 아니 단, 하루라도...”


그 짧은 말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

이는 승리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었다.

사비의 대탈출을 위한 희생 작전이었다.


“병력은 어찌하실 것입니까?”

“백강 2만, 황산 5천.”


터무니없는 전략이었다.

케이린이든 당이든 적 일부가 우회 공격해 올 경우 방어할 병력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케이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는 경로에 있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왕족과 고관대작들은 소리 소문 없이 웅진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군영에는 당 수군이 해안을 따라 남하 중이라는 급보가 이어졌다.

육로를 장악한 케이린군은 사비를 정조준하여 외곽 방어선을 우회하고 있다.


한때 동맹이었던 고구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야마토는 열도에서 발도 뗐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땅엔 더 이상 기댈 우군도, 물러설 틈도 없는 것이다.

황산은 방어 전선이 아니라 지연 전선이었다.


사비성, 밤하늘은 어둡고 창백했다.

병영 너머로 긴 북소리가 낮게 울렸다.

군령의 북은 평소보다 더 느렸고, 더 무거웠다.

술렁거리는 병사들의 무기를 점검하는 손길도 어딘가 모르게 둔해져 있었다.


총군장의 명령을 받은 카이바기는 무거운 기색으로 막사에서 물러 나왔다.

어깨는 단단히 조여 묶인 갑옷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카이바기의 눈은 초점을 흐려진 채 허공 어딘가 향하고 있었다.


처제인 적사원안이 회랑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 한 줄기에 그녀의 무녀 옷자락이 고요히 흔들렸다.

적사원안이 비죽거리며 말했다.

"형부, 그렇게 죽을 얼굴로 나서면 병사들이 먼저 도망칠지도 몰라요."


"나는 살아남을 얼굴을 하고 싶지 않다."

"페제에 가망이 없는 건 아니죠."


"가망? 가하고 가하지 않고를 누가 정한단 말이냐?"

“신… 그리고 신은 피에 감응해요.

특히, 스스로 바친 순결한 피”


“잔혹한 마한의 제례 아니냐?”

“형부, 지금 페제는… 잔혹하지 않은가요?”


적사원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카이바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침묵한 후,

카이바기는 그 말을 털어버리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가버렸다.

그 말은 흩어지지 않고, 그의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적사원안이 그를 불렀으나 말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집으로 향했다.

성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거리는 불안한 침묵으로 잠겨 있었다.


대문을 열자, 아내 적사무원이 등불을 들고 마주 섰다.

그의 의욕을 잃은 눈을 보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딸은 방 안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고, 그 잠을 깨우지 않았다.

“사비성은 무너질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싸우러 가시겠죠”

적사무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 아이들은 장터에 팔릴 것이고, 당신은… 적에게 욕보일 것이다.”


적사무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당신은 싸워야 하죠.”


카이바기는 단검을 꺼냈다.

적사무원은 마지막 소망을 말했다.

“다음 생엔… 당신은 그냥 물고기나 잡고, 저는… 밭을 일구고 살아요.”


카이바기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차마 적사무원의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적사무원을 끌어안고 잠든 카이바기는 악몽을 꾸었다.

페제의 백성들이 굴비처럼 엮여 낯선 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적사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바기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아내와 아이들을 찾다가

번쩍 눈을 떴다.


쇠 냄새 같은 선명한 피내음…

카이바기가 곁방으로 달려갔을 때

적사무원은 이미 숨을 거둔 채였다.

딸들도 꿈속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새벽녘.

검붉은 연기가 카이바기 대군장의 저택 위로 치솟았다.

불씨가 기와를 타고 옮겨갔고, 이내 저택 전체가 화마에 삼켜졌다.

투구를 깊게 눌러쓴 카이바기 대군장은 사비를 등진 채 뒤돌아보지 않았다.


비장한 얼굴의 오천 결사대도 황산으로 묵묵히 진군해 갔다.

아침이 밝자 사비 전체에 무거운 소문이 돌았다.

카이바기 대군장이 제 손으로 가족을 베고 황산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사비의 불안한 바람이 골목마다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다녔다.


그날 아침, 적사원안은 무너진 집터로 달려왔다.

불탄 기둥, 쓰러진 석축,

설마 하고 달려온 적사무원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적사원안은 저택의 앞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그저 눈앞의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의 원혼은 이미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적사원안은 얼굴에 마른 눈물자국을 훔치며 절을 올렸다.

관도, 상주도 없는 장례였다.

잔재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향처럼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적사원안은 제례 얘기를 한 자신을 저주했다.


그녀는 폐허가 된 저택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 혼잣말했다.

“카이바기 네가 제례를 위해… 언니를 죽인 거지?”


불꽃은 사그라져갔으나 적사원안의 마음에 커다란 원한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는 단검으로 손바닥을 베어 사그라져가는 불길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카이바기, 반드시 네놈도 페제도 멸망시켜 줄게..."

그녀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