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제의 무녀
황산의 산야.
등 뒤에서 휘몰아쳐오는 바람이 카이바기(階伯) 대군장의 창 끝에서 파공음을 냈다.
황산 풀잎에 흩뿌려진 핏방울을 페제(百濟)의 바람이 휩쓸고 갔다.
핏방울들은 풀잎 끝으로 쓸려가 흙 속으로도 스미기도 전 언덕을 흘러내렸다.
카이바기 대군장은 조룡대 방향을 돌아보았다.
페제의 무녀 사야의 주술력이 전장을 뒤덮고 있었다.
돌풍이 황산의 저공을 가르자 적들은 눈초자 뜨지 못했다.
바람이 귓가에서 석적처럼 날카롭게 파공음을 내었다.
카이바기 대군장은 바람을 가르며 대창을 높이 들었다.
"페제- 나랏사요!"
(페제의 무사들이여)
페제의 군사들이 일제히 소리 질렀다.
카이바기! 카이바기!
카이바기 대군장이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사야의 바람이 분다!"
사기 충천한 오천 결사대 병사들이
창칼을 치켜들고 함성을 질렀다.
페제 마라비 사야! 페제 마라비 사야!
(페제의 무녀 사야! 페제의 무녀 사야!)
봉황이 수놓아진 궁수 나루비군의 황색 깃발이 올라갔다.
"나루비 시히!"
궁병들은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채 숨조차 쉬지 못하고 대군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카이바기 대군장의 대창이 눕혀지자 황색깃발도 케이린군을 향하여 누웠다.
사야의 바람을 타고 일제히 화살이 높이 날아올라 적의 머리 위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쒸이익- 강풍을 탄 페제군 화살의 위력은 케이린(鷄林)군 전면 전열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케이린군의 비명과 아우성으로 황산에 지옥도가 열리고 있었다.
다시 붉은색 기병 마로비 깃발이 높이 치솓고
카이바기대군장의 대창이 우측단을 향하여 눕혀졌다.
붉은 마로비 깃발도 거의 동시에 케이린군 우측으로 향했다.
"마로비 우나로!"
마로비 기마대가 우측 측면을 돌파하게 위해 언덕 아래로 노도처럼 밀려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청색 깃발이 눕혀졌다.
"돌카루!"
와아아-
돌카루(보병대)들은 황산을 찢는 함성과 함께 언덕아래로 돌진해 갔다.
사비의 대무녀가 케이린을 상징하는 닭의 목을 잘라서 땅에 뿌렸다.
제1열의 무녀들이 붉은 눈을 치켜뜨고 케이린을 향하여 저주의 주문을 외웠다.
제2열의 무녀들이 일제히 바람의 신에게 고하는 석적을 불었다.
백여 명의 무녀들은 전장의 의녀들이었고, 전장의 주술 병기들이었다.
주술무녀 마라비들은 페제의 전장이라면 어디든 병사들과 생사를 같이했다.
전장에서 쏟아부은 주술은 그녀들의 죽음으로 해체되었다.
적들에게 무녀들이란 마지막까지 살육되어야 하는 불길한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은 얼굴이며 온몸에 붉은 주사로 신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붉은 눈으로 적을 저주하며 날카로운 석적으로 적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그 눈을 마주친 적들은 지옥의 나찰을 보는 듯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나랏사요! 가라-
나랏사요! 가라-
페제 전군이 광폭한 바람이 되어 케이린군을 휘몰아쳤다.
무사들의 생존과 살육의 본능으로 뒤섞인 표정과 무녀들의 기묘한 노래가 압도적인 공포를 불러왔다.
페제의 바람이 모두를 살육의 전장으로 떠밀고 있었다.
5만 케이린 대군은 전열이 무너지며 군마가 대혼란에 빠졌다.
피바람이 적진을 휩쓸었고 페제군은 신병처럼 그들을 도륙했다.
크아악-
압도적인 페제군에 돌파된 케이린군은 붕괴되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페제군의 형상은 흡사 살육의 만찬에 내려온 전신이었다.
뼈와 살이 튀기는 황산벌의 도륙은 반나절 내내 계속되었다.
케이린군 참수 부대가 후방을 질주하면서 도주병들의 목을 쳤다.
눈앞의 참수부대가 미쳐 날뛰자 케이린군은 그제야 멈춰 섰다.
멈춰 선 자와 도망쳐오는 자가 뒤엉키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 이상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 모조리 죽인다!"
케이린 군장들이 말을 타고 누비며 넋이 나간 병사들을 채찍질과 욕설로
다스리고 나서야 겨우 전열이 수습되었다.
케이린 대군은 5리 밖까지 물러나서야 황산의 지옥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심을 수습하느라 거대 방어진을 치고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렸다.
이미 황산에는 도륙된 케이린군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케이린 대군장은 모든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도를 쳐들었다.
궤멸된 부대의 군장 여럿이 언덕 위에 무릎 꿇려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참수도가 번뜩이자 패장들의 목이 떨어져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렸다.
참수된 패장들의 목은 눈을 감지도 못하고 대창에 꿰어져 언덕 위에 세워졌다.
참혹한 처형의 공포가 케이린 군영을 휘감고 소용돌이쳤다.
카이바기 대군장도 피바람이 가라앉자 다시 언덕으로 군사를 물렸다.
승리한 페제군의 카이바기와 무녀 사야를 연호하는 함성이 황산을 가득 채웠다.
카이바기! 페제 사야-
카이바기! 페제 사야-
케이린 군장들조차 넋이 나간 듯 황산 언덕을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린 대군장은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해져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