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의 황룡
그 무렵 동쪽 서라벌의 화룽타라(皇龍寺)
황룡사 구층탑 아래에서 케이린 법사 묘련은 짧은 숨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은 연기를 그렸고, 입술은 오래된 진언을 더듬었다.
황룡사에 잠들어 있던 케이린의 수호신을 깨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탑은 묵묵했다.
향은 타올랐으나 기운은 응답하지 않았다.
절박해진 법사 묘련은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묘련은 살생으로 제례를 올릴 수 없는 법복을 입은 몸.
자신의 하찮은 피의 제례로라도 신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케이린의 황룡이시여… 구층탑에 깃든 호국룡이시여.
저의 소리를 들으소서. 케이린의 소리를 들으소서"
묘련이 고개를 들어 구층탑을 우러러보았다.
그의 선혈로 법복이 붉게 물들었다.
그 순간. 황룡사의 구층탑 꼭대기에서 번쩍이는 황금의 선광이 솟구쳤다.
그 빛은 대지를 갈랐고, 허공 위에 황금빛 용의 형체가 피어올랐다.
그의 비늘은 황금을 담았고, 눈동자는 별무늬처럼 빛났다.
용의 입에서 뇌성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진한의 신이노라."
케이린의 법사들은 일제히 부복하였다.
황룡의 쩌렁쩌렁한 노기 띤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어찌하여 이방의 술사 따위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냐.”
묘련은 두려움으로 더욱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감합니다. 케이린의 법사, 묘련. 황룡을 배알 합니다."
"케이린의 법사라고?"
"비록 이방의 법복을 입었으나 이곳을 지키는 자,
진한의 신을 모시는 소명을 받은 자입니다."
고대의 황룡이 산천의 공간이 찢어질 만큼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허튼소리... 제대로 된 제례조차 모르는 하찮은 술사 따위가..."
황룡은 시큰둥했다.
"황룡신이시여, 저의 소리를 들으소서."
"귀찮게 하지 말거라. 오랜만에 흥미로운 일을 보고 있지 않느냐."
법사들은 술기를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황룡이 페제의 무녀 사야에게 감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묘련은 절박한 목소리로 고하였다.
"지금, 페제 무녀의 주술로 케이린의 수만 병사가 도륙되고 있나이다.
바람의 주술을 거두어들이소서."
황룡의 눈이 옅게 빛났다.
“나도 그 여인의 기도를 들었다.
정결하고, 맑으며, 진실한 기도였다.
나는… 그 여인의 제례가 마음에 드는도다.”
법사들은 충격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적입니다! 저 사야는 페제의 무녀로서—”
황룡은 고개를 젖히며 한숨처럼 말했다.
“케이린, 너희는 나를 부르되 아무 제례도 올리지 않았다.
피도 없고, 노래도 없으며, 숨결도 없다.
불경과 불사로 나를 부르려 하다니—
나는 진한의 신이다.
예악을 모르는 자들이여,
어찌 나에게만 들어달라 하는가?”
케이린의 법사들은 말문을 잇지 못하고 모두 묘련을 쳐다보았다.
묘련이 아뢰었다.
"황룡이시어, 잠시만 기다려 주소서.
지금쯤 황산에서 제례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흥... 무례한 놈들이 제례는 무슨..."
황룡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페제의 황산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