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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18. 2021

21세기 귀족(30)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5세기. 부동산양극화가 불러온 멸국)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30)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5세기. 부동산양극화가 불러온 멸국)


5세기

5세기의 법에도 예속농과 노예를 명백하게 동일시 여겼다는 것이 드러난다. 당시 법사료에서 예속민들은 ‘태어난 땅의 노예들’로 지칭되었고, 지주들은 ‘주인’으로 지칭되었다. 또 409년에는 지주의 동의 없이는 예속농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법이, 언급했듯 412년에는 궁극적 목적은 이단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지주가 예속농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법이, 452년에는 지주 동의 없이 예속농은 수도원에 입적할 수 없었다는 법이 만들어졌다.[1] '임차인 = 예속농 = 노예'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가 되었다.


제도적으로나 법적으로나 토지가 없어서 타인으로부터 토지를 빌린 예속농은 노예로 간주되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반대로 본래 노예였던 외거노예는 지주의 사익적 목적에 따라 예속농으로 간주되었다.[2] 당연히 인격적인 종속과 이에 대한 공권력의 합법화 작업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징세권, 모병권, 치안권, 예속농 간 분쟁조정권(중세 영주들이 휘둘렀던 재판권 및 사법권은 아니었으나 흡사)을 휘둘렀다.[3]


 전통적인 공권력의 권한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기어이 토지사유제와 예속제 위에서 사적 남용의 대상이 되어 대지주들의 잇속을 챙겨주었다.[4] 특히 모병권에 대해서 말하자면, 본래 군역토사상에 따라 많은 토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이 담당해야할 군사적 업무가 기원전 107년의 군제개혁과 로마 후기의 토지양극화 때문에 땅 한 뙈기도 없는 빈자들에게 전가되는 수준을 넘어, 후자가 가난 때문에 자발적으로 입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소유자가 토지 없는 자들을 사실상 강제 징병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어느 측면을 보아도 지주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건국 이후 천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그리고 서로마의 멸국이 눈앞에 올 때까지 로마의 대지주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토지 재산과 주머니였다. 5세기 중엽 서로마의 연 예산은 약 금화 2만 파운드였으나 지주 중에 지주였던 원로원 의원의 연 수입이 어렵지 않게 약 금화 6천만 파운드를 넘었다는 사실은[5] 이를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앞서 언급했던 빌라 등의 당시 로마 대지주의 거주지 등은 중세의 요새 및 성곽과 비교해선 방위의 기능이 약했지만[6] 여러모로 위와 같은 것들은 3세기 후반에서 5세기의 로마 사회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것들은 후의 중세 유럽에서 영주가 다스리는 상업도시(부르구스burgus)의 형성 원인 및 배경과 매우 흡사한 변화가 더 일찍이 이 시기에 있었다. 지난 3~4세기에 군복무를 했던 사람들이 로마 제국 내의 상당한 고위직을 차지할 정도로 위신이 좋아졌던 점, 중세 유럽에서 군주에게 군사적 충성을 바쳤던 영주들의 지방권력이 갈수록 강해졌다는 점, 토지사유제의 발달로 고대 로마나 중세 유럽이나 정치경제적 상황이 어지러워졌다는 점이 그러했다.


 마르크 블로크(Mark Bloch)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로마의 빌라 형성 등을 그 근거로 이러한 로마 말기부터 영주제 및 봉건제(의 성격)가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만 재판권에 준하는 지주 및 영주의 권력의 대상이 되는 인민의 범위, 지대의 종류 차이, 지주권의 공권적 성격의 크고 작음의 차이 등의 몇 차이가 있다.[7] 허나 전체적으로 보아 게르만족의 중세 유럽에서 지주권이 강력해지고 소작인을 노예처럼 인신적으로 구속하는 법제를 로마로부터 계승한 것은 확실하다.[8]


동로마에서 435년부터 편찬 작업에 들어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법전이 편찬되고 439년부터 시행되었다. 한편 서로마에 이 법전이 도입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치세(425~455)에 이루어져 동과 서 모두에서 두루 적용되었는데 언급했듯 유제 법전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5세기에 만들어진, 테오도시우스 대리석 얼굴(Marie-Lan Nguyen (User:Jastrow), 2009.)


세기말에 제국은 특히 서부는 대토지를 단위로 정치경제적 독립체들이 발달하였는데,[9] 이는 머지않은 중세 유럽의 영주제도에 대한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건국 시점부터 개인의 토지는 국가의 토지와 분리되었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로마 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어코 476년 서로마가 멸망했다. 결국 토지문제는 제국의 경제사회를 멸망에 이르기까지 뒤 흔들었으며 끝내 인류사 최강의 제국의 절반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규모만 다를 뿐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멸국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배가 터지도록 부른 로마의 대지주들은 모국의 멸망 직전에나마 그리스인들처럼 떨쳐 일어났을까? 갈리아-로마의 한 귀족이 서로마 제국이 이미 멸망한 것도 모른 채, 과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했던 성자를 우습게 여겼던 일화는[10]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는 것 같다. 로마의 지주들은 모국이 아니라 자신의 토지에만 관심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5세기 로마를 살펴보았다.


(1) 로마사 옛날 최강의 군사력은 옛일이 되었다. 지주들에게 '부동산 소유에 따르는 공공의 부담'을 맡기지 않고 되려 부동산 소유가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 부담을 떠넘김에 따라 국력이 크게 기울었다.


(2) 온 백성이 부동산 소유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자신의 부동산을 빌린 임차인들을 마치 노예처럼 여기는 사회가 되었다. 국가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으니 글도 모르는 야만인들의 침입에 크게 흔들렸고 대제국의 절반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References


[1]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51쪽.

[2] 상게서, 152쪽.

[3] 상게서, 152쪽.

[4] 상게서, 152쪽.

[5] Patric J. Geary/이종경 옮김, 『메로빙거의 세계』(지식의 풍경, 2002), 52쪽.

[6] 시오노 나나미/심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15』(한길사, 2007), 90쪽.

[7] 이기영, 전게서, 153쪽.

[8] 이기영, 전게서, 154~155쪽.

[9]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381쪽.

[10] Geary/이종경 옮김, 전게서,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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