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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어긋나는 날

그런 날엔 일찍 집으로

by 윤혜경

브런치 팝업 전시회 초대장을 받았었다. 요즘 매스꺼움 증세가 잦아진 큰딸과 함께 경복궁역 부근 팝업스토어 장소를 향해 넉넉하게 일찍 출발했다. 옆지기가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니 시간이 예정보다 더 많이 절약되었다.



그런 날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로 지하철 탑승장에 막 올라가는데 지하철이 떠났다.

마치 '오늘은 조금씩 놓치는 일이 이어질 거예요'를 알리는 듯.


시간이 빠듯할 때는 당황스러울 일이지만 우린 시간이 넉넉해서 달릴 필요가 없다.

달려서 "홈 인 (home in)" 하는 대신 우린 천천히 움직였고, 눈앞에서 지하철이 문을 닫고 떠났다. 괜찮다.


다음 지하철이 3분 후쯤 도착했다.

3개 역을 지났을 때 반가운 사람이 승차했다.

옆칸의 경로석으로 가는 그녀를 보고 마음은 달려가고 싶었다.


그 마음을 누르고 핸드폰으로 남은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충무로에서 환승하기 전 그녀를 찾아갔다.


나보다 3살쯤 많을 그녀.

그녀를 해외 거주 중 처음 만났었다.

그녀는 딸 셋, 나는 딸 둘을 키우는 큰며느리들이었다. 그녀도 나도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시댁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한국에 출장을 다녀온 그녀의 남편에게 시댁에서 아들 낳는 한약을 들려 보냈다.

그녀 나이가...


남편에게 남긴 할아버지의 유산을 내가 아들 낳을 때까지 시댁 작은 어머니는 아버님 세대의 삼 형제가 보관하겠다고 주장한걸로 전해 들었다. 결국 그분들이 나누어 가졌다. 하늘로 가실 때는 맡고 있던 할아버지 유산 1/3을 당신의 막내딸에게 남기고 빈손으로 떠나셨다.


우린 이미 서양물이 들어서 딸들을 잘 키울 생각을 단단히 한 며느리들인데, 옛 시절에 귀하게 대학을 나오신 분들인데도 생각이 참 달랐다.


전직 교사와 큰 며느리라는 공통점에 둘째 딸들의 나이가 같은 덕분에 공동화제가 많은 친구사이가 되었다. 사는 동네는 달라도 아이들은 토요일에 같은 한글학교에 다녔다.


이후 그녀는 지금껏 내 멘토역할을 하는 귀한 친구이다. 마음 넉넉한 그녀는 자원봉사자로 불교단체의 교육 관리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지혜 많은 그녀는 평상심 유지를 참 잘한다.


삶이란 게 늘 정답만 있는 건 아니어서 가끔은 넘어진 덕분에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지하철 놓치기를 잘했다.


내릴 역을 두어 개쯤 앞서서 친구를 찾아 옆칸으로 갔다. 용한 지하철 내라서 서로 낮은 소리로 인사를 교환하고, 두 손을 꼭 잡고 얼굴에 웃음을 얹었다.


내릴 곳이 달라 헤어진 뒤 조금 더 가서 목적지역에 내렸다.


경복궁역에서 4분 거리라고 안내되어 있었는데... 경복궁역 부근은 골목이 참 많다.

또 옛길이어서 여간 좁고 막힌 길에 가서야 깨닫고 돌아 나오는 일이 생긴다.



비문해자가 되는 날


대림미술관 앞에 서있던 젊은 청년이 내 핸드폰의 지도를 보며 알려줘서 바로 다음 길에 있는 목적지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럴 때 나는 비문해자가 된다.


지도가 아주 자세히 올려져 있는데도 돋보기를 써서 봐야 하니 남에게 기댄다. 사실은 큰 눈을 더 크게 떠도 독도법에 서툴러서 무용지물이다. 근시와 원시가 함께 자리한 시력이 자연스러운 노년(?)이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조금 불편하다.


1990년대에는 전날 미리 지도를 확인하고 백지에 갈 길을 약도로 그렸다. 운전하면서 그 약도와 지도책을 동서남북으로 돌려가며 길을 찾아냈었다.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카카오맵도 돋보기가 없으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맨눈으로는 잘못 읽으니 자주 난감하다.


<반려동물과 소리 내어 책 읽기>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인데 참 민망하다. 전직 중등교사로 몇 년 전 문해교육사 자격증을 어렵게 교육받아 취득했는데, 핸드폰을 이용한 지도 찾기에서는 자주 비문해자가 되곤 한다.


큰 길가에 직진으로 4분 거리의 건물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지도를 잘못 읽어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ㄷ자로 돌아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찍 출발해서 시간이 40분도 넘게 이른 시간에 목적지 근처의 지하철역에 도착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길을 찾느라 긴장했던 당시에는 집에서 미리 카카오 지도를 확인하지 않았던 데 대해 조금 불편한 마음이 되었지만, 결국 예쁜 가을햇살을 받으며 자연스레 걷기 운동을 큰 딸과 함께 했으니 좋다.


딸은 복잡한 지하철 속에서 시작된 메스꺼움 증세가 길을 헤매는 동안 조금 더 심해졌다. 그래도 씩씩하게 길을 묻고 핸드폰 지도를 보며, 핸드폰 지도에 눈뜬장님이 된 나를 이끌었다.


목적지의 1층에서 화살표 스티커 사용에 서툴러서 스티커인지도 모르고 벽에 붙였다가 그냥 떨어져서 난감했다. 그곳에 그림으로 설명이 표시되어 있는데, 읽지 않고 행동부터 한 까닭이다. 어렵게 벗겨내고 끈적이는 부분을 벽에 붙여서 1차 참여를 마쳤다. 다시 보니 이미 먼저 벗겨낸 스티커 껍질이 담겨있는 통이 있었다. 자세히 돌아보지도 않고 짐작으로 덤벙대었다.


추석 이후 부직포 인형을 까만 부직포 판에 척척 붙이며(부직포라서 잘 들러붙는다) 손주와 <먹보 다람쥐> 이야기를 몇 차례 이어갔던 후유증인가 보다.


3층까지 이어진 전시된 작품 공간들을 둘러보며 "글 잘 쓰는 브런치 작가"들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브런치 측은 방문자들에게서 시간 예약을 받아 운영했지만, 첫날 오전인데도 팝업스토어 현장 방문객이 많았다.


여기저기 젊은 안내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1, 2 일부 직원들은 목소리가 크고 지적하고 지시하는 스타일의 응대여서 보기에 불편했다. 3층의 20대 여성 안내원은 같은 말을 계속 주장하는 60대 남성 작가를 지치지도 않고 친절하게 반복 안내했다. 보고있는 내가 미안했다.



옆지기가 안 와서 정말 잘했다.


3층까지 비좁은 계단을 걸어 오르는 데다가 좁은 벽에 붙여진 작은 엽서들을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같은 주제로 얼마나 다양하게 풀어쓰는지 궁금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결국 4개도 채 못 읽고 포기했다.


일찍 나왔다. 오늘의 목표는 이렇게 내려졌다. 함께 경복궁 근처에서 점심을 먹자고 부추겼지만, 다른 할 일이 있다며 거절한 그이 덕분에 그이의 발걸음에 실망을 올리지 않게 된 셈이다. 다행이다. 동행해 준 큰딸에게도 미안했다.


요즘 지하철 역사 내의 이동 방향은 우측통행이다. 길거리에서도 우측통행으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차들은 오른쪽길, 사람들은 왼쪽길"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좌측통행에 익숙해있다가 보행자가 '인도에서 우측 걷기'에 적응되는 데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슬픈 이태원 핼로윈데이의 보행자 압사사고는 도로 이동 방향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고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엉키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브런치 엽서 전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난데없이 좌측통행으로 계단에 화살표가 있었다. 미처 화살표를 인지하지 못한 우리 팀은 우측통행으로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안내자의 제지를 받았다.


"좌측 통행 하세요!"


왜 그랬을까?

누구의 아이디어로 난데없는 좌측통행을 만들어놓은 건지... 이제 익숙해진 "보행자 우측통행" 사회에서 바닥에 붙여진 화살표를 보고 좌측통행을 따르라는 시도는 어설펐다. 바닥의 화살표를 발견하고 따르기 전에 이미 인도의 보행자 우측통행에 몸이 반응한 까닭이다.



이런 날은 붕어빵을 베어 물고


사실 모든 약속을 취소할 만큼 이번 주는 빠듯한 일정이었는데...

가을 햇살을 즐겨보고자 일탈을 시도했다가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 상황의 헐거움에 조금 불편함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점심, 밖에서 먹을까?"

고맙게 동행해 준 큰딸에게 물었다.

"아니, 오늘은 집에서 행복하게..."


맞다.

이런 날은 집에 가서 선택의 여지가 많은 냉장고를 열어보는 게 좋겠다.


출처: 중소기업뉴스 2022-11-22


집 근처 지하철 역 입구에 도착했을 때 역사 에스컬레이터 안까지 고소한 내음이 퍼지고 있었다. 길거리 붕어빵을 3개 샀다. 우린 버스 정류장까지 달콤한 팥이 듬뿍 담긴 붕어빵을 물고 걸으며, 다시 마음이 달콤해졌다.


시드니에서는 아침 출근길에 작은 사과를 깨물며 지하철역을 향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학생들의 스포츠데이에 수영시합을 진행하는 교사들은 따로 점심시간이 없었다.

교사진행요원들은 사과를 베어 물고 우걱이다가, 학부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빨 자욱이 난 사과를 손에 든 교사들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아이들을 큰소리로 응원했었다.


우리나라에선 길거리를 가면서 음식을 먹는 사람이 드문 편이다. 길거리에서 큰딸과 나는 뜨거운 단팥 붕어빵을 베어물곤 한다. 입술 끝에 얹힌 달콤한 행복이 참 좋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다,

사소하게 엇갈리는 느낌이 얹히는 날.


그런 날엔 일찍 들어가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나를 받아주는 가족이 있어 참 고맙다.

매일매일 쉼 없이 작업을 해왔으니, 오늘 하루는 이렇게 헐겁게 보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머릿속을 가을의 알싸한 공기와 따스한 햇살로 헹궈냈으니 다시 상큼하게 시작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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