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페르시아의 고대사, 중세사, 근세사, 근대사, 현대사
<제1부, 고대사: 페르시아 제국 vs 그리스, 로마 전쟁기>
1. 이란 고대사의 최정점인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은 동양적 전제 군주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성립된 막강한 대제국이었다. 헤로도토스의『역사』에 따르면, 페르시아 황제는 1만 명의 최정예 근위대인 '아타나토이(불사부대)'를 운용했다. 이는 먼 훗날 등장할 세계 최강군 대몽골제국의 '케셰크(Kheshig, 케시크)'과 유사한 황제의 최정예 친위 군단이었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는 서방 원정을 감행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패배는 서양사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으나,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거대 제국이 변방의 소요를 진압하려다 겪은 보급 및 전략적 과부하"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즉, 페르시아 제국의 실패는 군사력 부족보다는 원거리 원정의 병참 한계에 기인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군사력 자체는 그리스보다 훨씬 막강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세계 역학계의 대부분의 해석이다.
2. 알렉산드로스 제국 붕괴 후 등장한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서양사에서는 '한니발'이라는 거장의 등장 때문에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수를 카르타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수는 바로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기원전 53년에 발생한 카르해 전투에서 파르티아의 장수인 수렌은 로마의 크라수스 군단을 전멸시켰다. 게다가 샤푸르 1세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생포하는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웠다. 이는 동양의 군사력이 서양의 군사 패권을 압도한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제2부, 중세사: 세계 최강 군사 패권 대몽골제국의 이란 정복과 식민지배>
1. 세계 군사 패권제국인 대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자인 칭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호라즘 샤 제국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키질쿰 사막을 돌파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배후를 정밀타격했다. 이는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완벽하면서도 뛰어난 포위 섬멸전으로 평가받는다(그리고 세계사에서 가장 완벽한 이 포위 섬멸전을 21세기의 소련군과 러시아군, 미군은 최정예 군사 훈련의 교본으로 삼아서 훈련을 했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어 사용권인 중동, 서아시아시아와 이란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2. 세계 군사 패권제국 대몽골제국의 제3차 세계 원정군의 총사령관 훌라구 장군은 1258년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빠르게 아바스 제국(아바스 칼리파조)을 정복한 후, 페르시아 제국(이란 제국) 지역에 '일칸국(Ilkhanate)'을 건국했다.
페르시아 제국(이란 제국)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배한 대몽골제국들 중 하나인 일칸국의 가잔 칸의 군사 개혁과 세계화 전략으로 인해 그(가잔 칸)는 몽골제국군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식민지배하면서 끌고 온 페르시아 제국의 수많은 전쟁 포로들 중 가장 뛰어난 대석학이었던 라시드 앗 딘(당시 대몽골제국이나 대몽골제국을 계승한 티무르 제국은 세계 정복하면서 수많은 제국들을 학살, 파괴하여 전쟁 포로들을 끌고 왔으나 유일하게 '기술자'들만은 학살하지 않고 생포해서 끌고 갔다)에게 명령을 선포하여 '세계사'를 집필하게 했는데, 이 세계사의 이름은『집사(Jami al-Tawarikh)』로, 대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사를 기술한 세계사 책으로 세계 역사학계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세계사' 책으로 등극되어 있다.
즉, 세계 최강 제국 대몽골제국의 황제 '가잔 칸'의 페르시아인 전쟁 포로 출신이었던 라시드 앗 딘은 몽골제국이 정복한 전 세계 제국들(중국, 중앙아시아, 중동, 서아시아, 이슬람, 유럽, 동북아시아, 시베리아, 고려, 동남아시아 미얀마, 유대 역사 등등등을 총집결한 전 세계를 기록한 세계 최초의 세계사『집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당시 세계 최강 제국 대몽골제국이라는 세계화된 플랫폼이 있었기에 가능한 세계사적 대업"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기에 '집사'의 기술은 대몽골제국이 세계 파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의 연결자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료다. 그리고 이런 대몽골제국의 세계 지배에서 이란(페르시아)는 선봉대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제3부, 중세사(말기):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이란 정복과 식민지배>
1. 세계 최강 제국이었던 대몽골제국이 분열된 후,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군인이자 대몽골제국의 군사 귀족 명문가문인 바를라스부(Барулас) 출신의 '티무르(Amir Timur)'는 '칭기스칸의 직계 후예'와 혼인한 후에 스스로를 '칭기스칸의 후예'라 칭하며 자신이야말로 전 세계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한 칭기스칸의 직계 후예라고 선포하며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제국이었던 대몽골제국의 재건을 천명했다.
대몽골제국의 군인 귀족 명문가인 바를라스부(Барулас) 출신이었던 티무르는 칭기스칸의 직계 혈통인 '아르탄 우르크(Altun Urugh, 황금씨족)' 소속까지는 아니었기에 스스로 '칸(Khan)'에 즉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미르(Amir, 몽골계 세계 제국의 대장군, 군사령관)'라는 칭호와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인 칭기스칸의 부마'를 뜻하는 '구레겐(Guregen)'의 지위에 등극하여 군사적 패권으로 세계 제국을 통솔했다. 이러한 군인 세계 최강 군인 제국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군인식 제국 통치 구조는 중세 일본 가마쿠라 군사 막부(군부)~에도 막부(군부) 시대, 상징적 권위의 천황(天皇, 덴노)보다 강력한 군권을 차지하여 군대의 총사령권을 행사했던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 쇼군)의 체제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티무르가 완전히 칭기스칸의 직계 후예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티무르의 부계가 아니라 모계쪽이 칭기스칸의 후예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성우월주의가 워낙 막강했던 몽골 사회에서는 오로지 부계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부친이 아니라면 직계 혈통(황금씨족)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칭기스칸의 직계 후예인 공주와 혼인을 했어도 결국 '칸(Khan)'으로 등극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티무르는 자신의 선조인 칭기스칸을 누구보다 동경했으며,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을 다시금 재현시킨다는 광기에 가득찬 대정복자이자 대학살자이기도 했다.
칭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할 때 구사한 전술을 완벽히 터득한 티무르는 이란 정복에 사용했는데, 그렇게 티무르는 이스파한 등지에서 저항하는 세력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무자비한 대학살을 자행하며 전멸시킨 적군의 시체들로 해골 탑을 쌓았다고 한다. 대몽골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대학살은 먼 훗날 15세기 이후의 유럽의 대학살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는데 그 요인은 대몽골제국과 티무르 제국은 정주 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노예가 필요없었기 때문에 정복한 제국들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목초지로 바꿔버리는 전략으로 세계 정복을 빠르게 수행했기 때문이다(15세기 이후 유럽의 경우는 노예가 절실히 필요했었기에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이라도 포로를 죽이기보단 생포해서 노예로 만드는 것에 주력했기에 사실상 유럽은 학살보다는 노예 확보에 더 주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몽골계 티무르 제국은 예외 조건을 하나 포함시켜서 '학살'시키지 않았던 계층만은 분명히 했는데, 바로 기술자(장인)들이었다. 몽골계 티무르 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수많은 제국들에서 수많은 대학살들을 자행하면서도 뛰어난 기술자들 만큼은 학살하지 않고 생포하여 사마르칸트로 끌고 왔던 것이다. 이렇게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군사적 수도가 된 사마르칸트에 끌려온 수많은 전쟁 포로들은 사마르 칸트를 당시 세계 최고의 수도로 발전시켰으며, 특히 페르시아에서 전쟁 포로로 끌려온 수많은 기술자들이 사마르칸트를 당시 세계 최고의 위대한 군사 수도로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렇기에 서아시아 지역인 이란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는 오늘날까지도 중국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이 융합된 위대하면서 찬란한 세계적 문화유산의 기반이 되었다.
<제4부, 근세사: 이란계 사파비 제국 vs 오스만 투르크 vs 무굴제국(몽골) vs 러시아 제국의 패권 경쟁>
1. 세계 최강 제국 대몽골제국과 대몽골제국을 계승한 티무르 제국이 이란을 정복하고 오랫동안 식민지배한 후, 해방된 이란은 16세기 때 일어난 사파비 제국이 이란을 시아파(12이맘파) 제국으로 정체성 확립을 시도했다. 1514년에 발발한 찰디란 전투에서 이란처럼 오랫동안 몽골제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다가 해방된 오스만 투르크 제국 대 이란계 사파비 제국이 격돌했는데, 이 전쟁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예니체리 조총부대(화약무기)로 싸웠으며, 사파비 제국은 기마대가 충돌했다.
2. 인도에 세워진 무굴제국(Mughal Empire)은 그 이름 자체가 페르시아어로 '몽골제국'을 의미할 정도로 몽골제국을 계승한 대제국이다. 티무르 제국의 마지막 칸인 바부르가 인도 대륙을 정복한 후 세운 이 제국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Kandahar)를 두고 끊임없이 패권 경쟁을 벌였다. 이를 세계사에서는 '칸다하르 쟁탈전(Mughal-Safavid Wars)'이라고도 부른다.
1622년 사파비 제국의 아바스 1세가 칸다하르를 무력 점령했고, 이후 무굴 제국의 샤 자한(타지마할을 건설한 황제)이 이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원정군을 보내면서 전쟁은 장기화됐다.
1649~1653년까지 발발한 이 전쟁에서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황자 등이 원정대장이 되어 세 차례나 칸다하르를 포위 공격했으나, 긴 보급 문제와 사파비 제국군의 필사적 방어로 실패했다. 최종적으로 칸다하르는 사파비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며, 무굴 제국은 결국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침략을 단념해야 됐다.
3. 그러다가 18~19세기 카자르 제국 시기에는 남하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러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 코카서스 지역(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을 상실해야 됐다. 이는 오늘날 이란이 러시아에 대해 가지는 복합적 감정(경계와 협력)의 역사적 기원이기도 하다.
러시아-페르시아 전쟁(Russo-Persian War, 1722~1723년)의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 제국의 세종대왕이라 일컫는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가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카스피해 연안으로 진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했고 당시 사파비 제국은 내부 반란(아프간족의 침입)으로 멸망 직전의 혼란한 상태였다.
결국 러시아군은 데르벤트, 바쿠, 길란 등 카스피해 서남부 지역을 무력 점령했으며, 사파비 제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1723년)을 통해 해당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됐다. 물론, 이 영토들은 이후 사파비 제국을 실질적으로 계승한 나디르 샤 시대에 재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제5부, 현대사: 중국, 러시아의 최우선 동맹국이자 세계 4대 악의 축>
1.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친미 국가에서 반미(反美)의 선봉장으로 변모했다. 정규군을 불신한 하메네이 등 성직자 계급은 자신들을 호위할 별도의 군사 조직인 '혁명수비대'를 창설했다. 이는 마치 고려시대처럼 국가의 군대가 아닌 '군부의 군대'였다.
그리고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는 8년 간의 참혹한 전쟁을 통해 이란은 탄도 미사일 전력과 비대칭 전력(드론, 민병대 지원)의 중요성을 각인했다.
오늘날 이란은 미국의 제재에 맞서 중국(일대일로의 핵심 국가), 러시아와 '반서방 연대'를 구축하면 사실상 중국, 러시아의 가장 최우선 동맹국이자 '세계 4대 악의 축(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으로 군림하면서 세계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란은 러시아에 샤헤드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 개입하는 등 러시아나 중국에도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22년에는 히잡 미착용 혐의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의 의문사를 계기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 시위는 이란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혁명수비대는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고 인터넷을 전면 차단하는 등 토벌 작전을 펼쳤다. 국제 인권단체(Amnesty, HRANA)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약 22,000명이 체포되는 등 사실상의 '내전적 탄압'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포 통치는 2026년 현재까지도 이어져, 이란 사회는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그리고 결국, 2026년 1월에는 현재 보고된, 이란 혁명수비대(IRGC)에 의한 자국민 2만 명 학살(추정치로 아직 규모는 확실하진 않음)과 그리고 전화나 인터넷 및 통신망의 전면 차단 사태는 단순한 반국가 시위 진압을 넘어섰다.
반정부 매체와 세계 각국의 외신들은 지금 최소 이란에 1만 2천 명에서 최대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산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상 '내전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진압 방식은 무장헬기를 탄 이란의 군인들이 시위대 후두부를 겨냥한 무차별 사격 및 조준 사격 등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란 국영방송과 중앙은행 서버가 마비되고, 정권이 인터넷을 전면 차단한 것은 정보를 통제하고 있으며 이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끊어 학살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시도이며, 중국의 감시 통제 시스템이 이란에 이식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정보 검열과 통신 전면 차단으로 이란 당국은 시위대의 확산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있지만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더 거세지고 있다. 이번 이란 사태의 진압 방식은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처럼 무차별 진압 학살이라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기도 하여 국제 사회에 엄청나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