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사람

창조와 통제감

by 지전

Flow

몰입의 순간은 귀하다. 플로우(Flow)라는 개념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제안한 개념으로 일종의 무아지경의 상태를 의미한다.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리고 자의식도 사라진 채 오직 그 행위 자체와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플로우가 발동하는 조건은 세 가지가 있다. 1) 난이도가 적절하고, 2) 목표가 명확하며, 3) 피드백이 즉각적인 활동일 것.


나를 설명할 때 요리와 베이킹을 빼놓을 수는 없다.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대체로 잘하고 좋아하며 이 두 활동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꾸준하게 해 온 작업이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상이한 두 행위에 어떤 방식으로 몰입하게 되는지 말하고자 한다.



Cooking is an art

양파를 썰고 있다. 팬에는 버섯과 시금치가 지글거리고, 오븐 타이머는 4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지금 세 가지의 타임라인을 동시에 머릿속에 올려놓고 있다. 오븐 속 생선이 적당히 익는 시간과 팬 위에 야채의 완벽한 익힘 정도를 위한 시간이 같은 순간에 만날 수 있도록 머릿속에서 병렬로 트래킹 하며 설계도를 그린다. 요리는 즉흥적인 속성이 있다. 재료를 얼마든지 대체해서 사용할 수도 있고, 입맛에 따라, 심지어는 사용하는 냄비 크기에 따라 조리 방식이 조금씩 변주된다. 변수가 상시 발생하며 그것을 실시간으로 읽어내며 조율해내야 한다. 툭툭 터프하게 완성해 내는 재미가 있다. 오차를 즉흥적으로 메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쾌감이 생기며 언제나 플로우 상태에 빠져든다.



But baking is a science

베이킹도 요리의 일종으로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활동이다.

먼저 노트와 펜부터 꺼내 들고 레시피를 꼼꼼하게 작성한다. 사실 정확한 레시피를 서칭 하는 것부터 결과물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공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재료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전자저울로 정밀하게 계량을 마친 뒤 최대한 기계처럼 움직이며 다음의 공정 과정을 노트에 적은 그대로 수행한다. 정답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즉흥의 여지가 거의 없다. 처음에 설계한 그대로 결과물이 완성되었을 때의 만족감은 요리에서 얻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다. 변수를 통제하고 프로토콜을 충실히 따랐을 때 예측한 결과가 나오는 것에 대한 희열은 마치 엔지니어가 실험 결과를 보고 느끼는 만족감과 유사하다.


요리가 즉흥적인 변수와 리듬을 즐기는 재즈라면, 베이킹은 엄격한 형식미와 규칙 속에 답이 정해져 있는 클래식 교향곡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엄연히 다른 장르이다.



제어된 창조에 대한 욕구

대략 이런 식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는 건 구체적인 결과물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먹을 수도 있는 것이 주는 물성의 매력. 출근해서 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들 중 많은 것들이 추상적이다—문서 작성, 무한한 협의와 회의, 아이데이션 등. 무엇을 해냈다는 느낌이 생각보다 희미한 경우가 많다. 반면 위 두 행위는 내가 개입한 결과가 접시 위에 그대로 올라온다. 또한 본질을 들여다보면 두 행위 모두 혼돈(재료들)을 질서(요리)로 바꾸는 작업이다. 흩어진 재료들이 하나의 결과가 된다는 것. 다만 요리는 혼돈을 즉흥으로 길들이는 방식이고, 베이킹은 혼돈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플로우로 연결되는 이유도 확실하다. 목표가 명확하고 난이도도 적절하고 피드백은 이보다 즉각적일 수 없다. 그것이 재즈이든 클래식이든 나는 이 무대 위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플로우 상태에 들어간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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