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불참러의 항변
모임에 인원이 적을수록 좋다. 대체로 다수와 시간을 보내기보다 소수와 함께하길 선택하는 편이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아니다. 오히려 한 명 한 명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소수 인원의 경우 한 명 한 명이 독자적인 데이터로 구별된다. 개인의 서사를 자세히 읽어볼 수 있고 호기심이 생긴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 궁금증이 해소된다. 그러나 인원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희소성을 잃어버린다. 엔트로피는 치솟고 더 이상 개별적인 인격체가 아닌 웅성웅성거리는 매스(mass)로 인식된다. 입체적인 서사를 가진 캐릭터는 언제나 사랑할 만하다—사랑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우르르 모인 집단은 개성이 매몰된 평면적인 군중이다. 해상도는 떨어지고 나는 즉시 개별 데이터를 수집하길 포기한다.
이런 희소성의 문제는 나 스스로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나 자신의 존재감 역시 군중들 속에 희석되는 느낌이 든다. 다수 안에서 그냥 그들 중 하나(one of them)로 인식되는 일만큼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다.
얕고 사교적인 대화, 소위 스몰토크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유용한 사회적 기술이다. 짧은 시간 안에 우리 사이에 얼음을 깨고 친밀감을 쌓을 수 있다. 전혀 몰랐던 사람과도 단지 스몰 토크를 나눔으로써 금세 ‘아는 사이’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는 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서로를 안다는 의미인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서로 직업과 나이와 취미를 교환한 사이, 아는 사이라기보다 알기만 하는 사이에 가깝지 않나.
물론 다수의 모임에서도 스몰토크로 시작해 깊은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으며, 소수의 모임에서도 스몰토크는 필요하다. 그러나 인원이 많을수록 대화는 필연적으로 가장 넓은 공통분모를 향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안전한 주제, 누구에게나 무난한 온도. 깊이보다 넓이가 우선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투입되는 비용 대비 우리가 진짜 대화에 도달할 확률—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진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소수가 몸집이 커져서 다수가 되어버린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싶다. 초기의 순수한 이상을 품고 모인 소수가 몸집을 키우다가 점차 타락하는 것은 이미 역사가 수차례 증명한 패턴이다—종교 조직, 정치종파, 혁명 집단 등. 처음에 우리를 모이게 한 질문—우리는 왜 여기에 모였는가—에 대한 답은 흐릿해지며 본래의 목적보다 집단 유지 자체가 우선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두제의 철칙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소수의 권력층이 등장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제안한 과두제의 철칙(ehernes Gesetz der Oligarchie)에 따르면 아무리 민주적이고 숭고한 조직이라도, 규모가 커지면 결국 소수의 간부층이 권력을 독점하고 조직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고 한다. 결국 소수가 의사결정을 독점하게 되고 점차 관료화된다는 말이다.
프리라이더의 등장
또한 집단의 몸집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무임승차하기 유리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소수일 때는 각자의 기여도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누가 얼마나 진심인지, 누가 얼마나 움직이는지가 투명하다. 그러나 인원이 늘어날수록 기여도는 측정하기 어려워지고 그 틈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어쩌면 내가 다수 집단에 느끼는 불편함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규모가 커질수록 본질이 오염된다는 역사적 패턴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유전자에 새겨진 것일 수도 있다. 소수를 지키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인 셈이다.
내가 다수의 모임에서 한 발 물러서는 이유는 단지 '기가 빨려서',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특별하게 자세히 보고 싶어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진짜이길 바라서, 그 자리가 진심으로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더 많이, 더 넓게 끌어안는 방식으로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지만, 나는 정예 인원과 깊이 공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다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소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