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일기장에

창작본능

by 지전
이건 일기는 아닙니다

일기는 아니다. 힘 빼고 이것저것 적고 싶은 욕구를 해소할 수 있을만한 연습장을 찾다가 이곳에 왔다.

모든 것을 다 적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기가 아니다. 독자가 나 하나뿐인 일기장에 글을 쓸 때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별의별 이야기를 주책없이 늘어놓을 때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아니다. 최소한의 위엄은 지키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정제된 글을 적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고심한 글도 아닐 것이다. 스스로 글쓰기의 장벽을 낮추고 박리다매식으로 마구 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모든 사실을 다 적지는 못해도 적힌 것은 모두 진짜일 것이다.



입력과 출력

누구나 입력이 많은 시기가 있고 출력이 많은 시기가 있다. 이 시점 나의 경우 전자에 속한다.


입력으로 채워진다

아침 운동을 할 때는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팟캐스트를 듣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는데 작년에는 그렇게만 서른세 권쯤 읽었다. 일할 때나 잘 때 말고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주말이면 밀린 침착맨 원본 박물관을 틀어두거나 그것도 아니면 미드 등 시리즈물을 본다. 문화생활도 좋아한다. 최애의 공연은 반드시 보러 가고 관심 있는 테마의 전시가 있으면 종종 예약해 두고 방문한다. 맛집은 항상 간다. 일주일에 세 번은 요가 수업을 듣고 회사에서는 업무지시를 듣고 듣고 또 듣고.

보고 듣고 맛보며 일상은 입력으로 가득 채워진다.


반면 출력은

입력 없이는 좋은 출력이 있을 수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물밀듯이 들어오는 인풋 대비 아웃풋의 양이 현저하게 적은 것이 아닌가. 양질의 입력이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렇게 정성껏 채워진 지난 시간이 나를 더 나로 만드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소스를 바탕으로 어떤 형태로 건 출력값을 내고 싶다. 자기표현을 향한 욕망이 임계치를 넘어섰달까.

창조는 조물주를 모방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지 않던가.



말보다 글

언제나 말보다 글이 편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희한하게 입만 열면 횡설수설. 길을 잃어버린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고의 흐름 속도를 내 입이 따라가지 못해서이지 싶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주장의 논리 순서가 흐트러지고 그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어진다. 침착하게 하나씩 말하면 될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성격이 되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도 분명하고 전하고 싶은 급박한 마음도 간절한데 그걸 또박또박 차분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또 이미 세상에 나와버린 말들은 퇴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은 역시나 내게 불리하다.


글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을 와르르 적어낸 후에 얼마든지 퇴고의 퇴고를 거칠 수 있다. 게다가 표정이나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요소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여러모로 상황이나 맥락보다는 메시지 자체를 전달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에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적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앞으로 쓸 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것을 적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문을 열고 싶었다. 적다 보니 의도한 것보다 더 거창해진 느낌이 들지만 부담 없이 작은 이야기로 공간을 채우겠다. 적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기억나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누군가에겐 시답잖은 일들 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바로 이런 일들에 웃음 짓고 글썽일 것이다. 인생이 사실 작은 일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들은." (이슬아,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



자신 있는 나의 출력: baking!—이것은 pecan을 곁들인 banana brea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