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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Nov 28. 2021

낯선 자들의 공동체

#33. 이방인, 소속감.


  우리 중 누구도 본인의 출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인간은 사회에 내던져졌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회에 대해, 삶에 대해 소속감을 느끼라고 하면 마냥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인생은 길고 고통스러우며, 세상은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타인은 나에게 친절하기보단 무관심한 것 같고, 개인은 자신의 삶에 들이닥치는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어디에 있든, 내심 고독하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혼자다. 우리라는 표현조차 혼자인 개개인이 놓여있는 장소에 대뜸, 임시로 설치해놓은 울타리와 같다.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홀로 직면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느슨하게 경계지어진 울타리는 이 세상 곳곳에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모든 사회적 개인은 사방에 존재하는 울타리를 넘나들면서, 평생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존재론적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적어도 현대 사회에 속한 이들의 경우엔 그렇다. 역설적으로, 모든 것들이 분화되고 쪼개져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쌀 한 톨도 대형마트에 입점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고, 카페의 커피 한 모금의 출처에도 여러 나라를 횡단한 뒤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우면서도 불합리한 구조다. 세상에 내던져져 홀로 고독을 감당해야만 하는 인간이, 정작 자신의 삶을 꾸려가려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통신 수단과 이동 수단의 발달로 인해, 현대 사회의 개인은 어떤 울타리에도 가닿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울타리'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존재할 순 없다. 결국 우리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은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에서 발생한다. 타인이 이방인인 '나'에게, 혹은 고독을 망각한 개인이 고독한 타인에게 소속을 강요할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친구나 연인, 직장 동료나 가족의 경우에서조차, 개인은 얼마든지 각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다. 그럴 권리가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타인이 어떤 울타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개인은 그것을 막아서선 안 된다. 사람은 출생 이외의 거의 모든 종류의 세상사를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만약 상술한 내용이 인간 존재나, 그들 간 관계의 본질에 대한 핵심적인 속성을 시사한다면, 소속감이라는 개념은 다소 기만적으로 여겨질 법하다. 왜냐하면 이 같은 전제하에서 소속감이란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인 연결망 속에서 통용되는 필연적 느낌 같은 게 아니라, 단지 스스로 느끼고자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작위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관계를 선택하고, 그 관계에 자발적으로 헌신해야만 소속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울타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내려놔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에서 기인하는 근본적인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관계에 대한 헌신과 그것에서 만들어지는 소속감이란, 단순히 타자에 대한 것이 아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에 대한 소속감'을 증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자신의 출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인간은 시작부터, 자기 자신에게서조차 이방인인 셈이다. 이 경우, '나'는 아직 자신의 삶에 소속되지 않았다. 아기는 모친에게서 분리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빛을 마주하며 울음을 터트린다. 아기는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고, 자신의 감각 기관이 낯설고, 삶의 시작이 낯설다. 아기는 그 항거할 수 없는 고독과 존재론적 불안을 울음으로 발산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삶을 시작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아기는 출산됨과 동시에 주변에서의 무조건적인 환대와 기쁨의 찬사를 향유한다.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웃는다. 하지만 그 같은 과정은 새로 태어난 존재가 얼마간 머무를 사회적 장소를 마련해주는, 일말의 의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찬미하지만, 그것은 그 순간에 국한된 환희일 뿐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회적 존재에게 으레 그렇듯, 신생아에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다. 인간은 삶의 긴 여정에 있어 몇몇 찰나의 순간에야 합일(合一)의 상태에 머무를 뿐, 그 외의 거의 모든 시간 속에 홀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부모에게 오냐오냐 소리 들으며 자란 아이는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동일한 조건 속에서도, 어떤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그런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겸손하며 사려 깊게 성장한다. 결국 성정의 문제는 단순히, 아이에게 어떤 물질적 기반의 소속이 주어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다. 만약 아이가 자신의 삶에 있어 여전히 이방인으로 존재한다면, 하여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단순히 도구나 수단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소속감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리고 그 소속감의 부재를 소유욕이 대체하게 된다. 반대로 아이가 자신의 삶에 대해 소속감을 느끼고, 나아가 그것을 구성하는 외적인 요인들의 작용을 이해한다면, 그들 모두가 이 세상과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實感)한다면, 그 아이는 소속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장소에 존재하든 간에, 어느 울타리 안으로 접속하든 간에, 소속감을 만들어내는 아이는 삶을 보다 실천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여기서 실천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욱 넓은 시야에서, 가능한 많은 것들에 이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행동이나 선택을 취하는 태도의 지향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성장기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그래서 사회 속에 속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이것은 모든 개인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다. 우리는 언젠가 자신의 삶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 아니더라도, 나고 싶어서 난 세상이 아니더라도, 그런 시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인이 바로 이곳, 이때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 사실이 이뤄지기 전까지 세상의 얼마나 많은 변수와 우연, 필연과 노력이 수반됐는지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소속감을 쟁취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소속감이 어떻게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까? 그 이유는 소속감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과 좋고 나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비롯해 사물, 가치, 이념, 나라, 조직, 과거, 미래, 학문, 개념 등 개인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망은 드넓다. 그 관계망 속에서 사람은 어찌 됐든 좋은 관계를 지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굳이 나쁜 관계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일이 손꼽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좋은 관계를 선별하고 그러한 형성을 추구해나갈 수 있을까? 혹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나와 다른 사회적 개인, 즉 수많은 타인과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해나갈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물음의 대답은 특정한 이름의 관계, 이를테면 연인, 친구, 가족 등 오로지 일부 집단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관계를 관통하는 바람직한 태도, 개별적인 말이나 행위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몸에 대한 신체 장악력이 뛰어난 사람은 어떤 운동을 해도 곧잘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적합한 그릇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어떤 존재를 들이부어도 적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삶에 소속감을 가지는 이의 세계를 상상해보라. 그는 삶이 예기치 않게 주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랬으면 어떻고, 저랬으면 어땠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롯이 자기 존재에 몰입해있다. 그는 단순히 제삼자로서가 아니라, 불만과 질투의 세계를 떠도는 추상적 자아로서가 아니라 일관된 몸과 정신을 갖추고 있는 주체이다. 그는 모든 하루가 일 년에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모든 일 초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기여하고 싶다.' 끝없이 이어지는 본인의 삶에, 나아가 그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타인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 '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과 이 시대를 수용하고, '나'와 외부 세계의 관계를 이로운 여정의 동반자로 인식한다.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소속감은, 개인이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울타리에 대한 공헌(貢獻) 욕구로 확장된다.


  이렇게 사람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공헌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 그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공헌한 만큼의 보상이 보장된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버리면서까지 타인에게 헌신하라는 말도 아니다. 단순히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라거나 기부를 독려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을 조망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명백한 보답이 전제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러한 기여의 영향을 아무도 모르게 되더라도, '나'와 세상의 관계 속에서 주체적으로 소속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개인은 이전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성취감 속에서 '좋은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사회에 내던져진 존재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인간은 여전히 존재론적 이방인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홀로 직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고독이다.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가닿을 수 있고, 이 세상이 보다 이로운 방향으로 뻗아 나가도록 기여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내심 고독하다. 하지만 '좋은 관계' 속에서의 개인은, 마냥 외롭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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