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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Nov 13. 2021

우리는 정말로 발전하고 있을까?

#32. 진화, 발전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는 상향식 발전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인 진화란 종이나 개체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에 보다 적합한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환경 조건에 부합하는 변화'다. 몸집이 작아지거나 행동 패턴이 단순해지는 게 장기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환경에 있다면, 생물은 그런 식으로 진화한다. 이런 맥락에서 퇴보도 일종의 진화인 셈이다. 따라서 자연의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표어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다. 육체적 강함, 정신적 우월함 같은 속성들이 생존에 항상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에서는 항상 능력의 진일보를 추구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능성을 극대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헬스를 통해 육체 능력을 향상시키고, 독서나 각종 공부를 통해 지적 능력을 가다듬는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생활하진 않지만, 내심 자신의 기능적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는 삶이 좋은 삶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지향점인 것처럼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기능성은 꼭 포괄적인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일컫는 건 아니다. 관계에 기여하는 사교성이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감수성, 욕구 충족을 향한 과도한 경쟁심 따위의 것들도 그가 내재하고 있는 기능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드러나는 양상이 어떨진 둘째 치더라도, 인간이 추구하는 진화는 항상 발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보다 멍청해지거나, 덜 건강하거나, 기타 기능적 역량이 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존재는 반직관적이다. 사람은 자연 세계에서 퇴화를 통한 환경 적응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굴욕적으로 느낀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닥치거나 갈등 상황에 직면할 때, 항상 지금보다 더 발전된 역량을 가정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만약 인간에게 환경 적응에 대한 방향성의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그는 항상 진일보의 발전을 추구할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설명된 것 같다. 내가 이 전제와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괴리를 지적하고자 함은, 인간의 발전 지향성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이중적인 의미의 진화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 발전이라고 믿는 퇴행적 진화를 여전히 일상적으로 감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기능성을 향상시키고, 더 나은 매일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나는 그러한 믿음에 회의적이다.


  이러한 괴리는 어떤 기준이 적용되어야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가능한 한 가지 방식은 인간이라는 존재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인 시사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하는가? 우리는 '왜' 발전을 지향하는가?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발전을 추구한다는 주장보다 더 근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순 있겠지만, 논의의 간소화를 위해 일단 그것을 행복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그 모든 고행을 감수한다. 행복이 상태인지, 과정인지, 성취인지, 특정한 감정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인간은 어쨌든 누구나 추상적인 개념의 행복을 추구한다. 의식적으로 행복해지고 싶다고 사고하진 않아도, 내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종국엔 죄의 무게가 덜어져 삶이 보다 편안해지길 바란다.


  어쨌든 상술한 논의가 일말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의 목표고, 그 수단으로써 상향식 발전을 채택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앞서 지적한 괴리,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이 추구하는 기능적 발전이 실은 퇴행을 내포하는 진화의 일종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은, 우리가 행복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기능적 퇴행을 감수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기능적 역량의 상향식 발전이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항상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기능적 퇴행을 감수하는가? 예컨대 우리는 점점 복잡한 걸 꺼려한다. 미디어 컨텐츠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밀도는 낮아진다.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15분 이상 넘어가는 영상을 클릭하는 데 망설인다. 긴 글과 짜임새 있는 문단 사이를 종횡하는 걸 질색한다. 그 대신 원본을 줄이고, 형태를 간소화하길 바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내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중 접속과 멀티태스킹으로부터 전보다 더 빨리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무언가에 오랫동안 집중할 수 없다며 증대하는 산만함에 대해 호소한다.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따라 우리의 뇌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조정되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리 긍정적인 발전 양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른 예로 문화적 전통이나 역사에 대한 멸시의 확산이 있다. 디지털 사회는 그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컨텐츠, 정보의 양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고전적인 콘텍스트를 달갑잖게 여긴다. 그것은 낡고 뒤쳐졌으며, 지금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구닥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첨단의 내용들을 소비하기도 벅차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나 교훈을 이끌어내려고 하기보단, 그저 현재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컨텐츠의 홍수에 몸을 맡긴다. 우리는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끼지만, 전보다 더 얕게 생각한다.


  이러한 양상은 '문제'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방향성이 산만함과 부산함이라면, 그러한 종류의 퇴행이 문제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가 행복한 시대일까? 물론 우리는 시대적으로 볼 때, 전례 없는 풍요 속에서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혜택의 목록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며 발생하는 인지적 퇴보, 정서적 단순화는 우리를 실제로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해야 하며, 첨단으로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이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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