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 Oct 16. 2021

이런 시대에 욕망이 가지는 의미

#31. 다원주의, 욕망.


욕망이나 정념, 감정 따위의 것들은 억제되고 조절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러한 소질들은 너무나 일시적이고 불안정해서, 이성적이고 신성한 존재인 인간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설명이 인류사의 오랜 기간 동안 이념적 주류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하지만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퉁쳐서 불리는 다양한 종류의 이념적 흐름이 등장하면서 '근대적 이성'에 대한 반기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인간의 정서적 측면이 내재하고 있는 기능이나 그 필요성, 욕망과 무의식 등 인간 이성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관한 재조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이성과 정서의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존재다. 심지어 혹자는 감정과 욕구의 충족이야말로 인간의 존재 의의이며, 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행복의 실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지적 확장은 현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됐다.


  먼저 다원주의 사회에 가능한 두 가지 시선을 언급해야겠다. 하나는 다양성으로부터 파생되는 무수한 시너지 효과를 예찬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에 따르면 우리는 여러가지 상이함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이는 사회의 발전을 급진시키는 장점이 있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체제로 수렴되는 사회는 사상적, 문화적으로 경직될 수밖에 없으며, 창의력과 융복합이 핵심인 4차 산업 시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각자의 개성이 인정되는 세상, 다양한 인종, 성별, 그들의 성적 취향 등이 편협한 기준에 의해 재단되거나 판단되지 않는 세상을 다원주의는 지향한다. 다원주의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사상적 유토피아이며, 인류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에 반해, 다원주의는 단지 다양한 이익 집단들이 각자도생의 길을 조장하는 파편화의 온상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말은 귀 기울여 듣지 않은 채 자신의 목소리만 우렁차게 키우며 살고 있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의 기준조차 다원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손익 계산에 따라 자신에게 이로운 이념이나 태도를 '선택'하여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각각의 정당성을 조율할 수단을 다원주의가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금을 올려야 하는가, 낮춰야 하는가? 선택적 복지가 옳은가, 보편적 복지가 옳은가? 우리는 이런 다양한 정치적 의제에서 특정한 견해를 지지하며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지만, 사실 그러한 느낌은 대체로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합리적인 견해'가 반대편에도 존재하며, 그들 역시 당신과 똑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느낌' 사이에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지 판가름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적어도 다원주의의 기치 아래엔 없다. 그래서 현대 정치는 대체로 서로를 비방하고 자신이 옳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서로 진심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으며, 실제로 그 각각의 믿음들은 저마다의 논리로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다원주의 내의 권력은 중립적인 옳고 그름에 의해 분배되는 게 아니라, 세력의 규모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앞선 다원주의에 관한 두 가지 시선이 모두 타당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느 쪽이 타당한지 확실하게 결론짓기 힘들다는 점에서, 후자의 입장이 좀 더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에선 '왜 다원화된 공론장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율되어야 하나'  물을 수 있다. 세금을 높일지 낮출지 주장하는 각각의 의견은 공론장에서 시대 상황에 맞게, 국민 정서의 흐름에 맞게 서로 타협점을 찾아가면 될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생태계가 스스로 조화를 형성해가듯이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당화된다. 다원주의 안에서 진리는 상대적이다.


  사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까운 입장이다. 다원주의는 물론 다양한 이점이 있지만, 종종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민주주의 제도에 반대하거나, 다양성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겐 종종 특정한 개념, 특정한 영역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별해줄 특정한 도구가 필요하다. 이 또한 어쩌면 내가 나의 믿음을 사회적으로 관철하고 싶다는 권력 의지가 작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원주의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거의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반면, 그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비판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에 대한 설명 자체가 모든 사상적 주장을 'one of them'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망이나 정념에 대한 특정한 주장을 시도하려고 한다. 욕망은 추구될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는 그것의 충족을 지향해야 하는가, 아니면 억제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특정한 철학적 사조 내에서 언급되듯 생산하는 힘의 총칭을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인 사용에 있어 다양한 욕구 체계를 의미하는 욕망 개념을 논의하고자 한다. 욕망은 좋은 것인가?


  욕망이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반론이 곧바로 제기될 수 있다. 이는 말하자면 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칼은 의사가 쓰면 사람을 살리는 좋은 것이고, 살인자가 쓰면 사람을 죽이는 나쁜 것이다. 즉, 칼 자체는 좋고 나쁨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으며 오로지 특정한 맥락과 결부됐을 때, 그것에 대해 적절히 판단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욕망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것의 충족으로 말미암아 쾌감과 만족감을 선사한다면 욕망은 좋은 것, 긍정적인 것이고, 자신을 고갈시키고, 의존하고, 집착하게 만든다면 그 욕망은 나쁜 것,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니 욕망 그 자체는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전형적인 다원주의적 견해이다.


  이러한 반론은 오로지 욕망을 그것의 사용과 결부시켜서 비판할 때나 가능한 반론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욕망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단 욕망의 본질은 무엇이며, 보편적인 속성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그에 따라 그것들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지 평가해보려는 것이다. 


  욕망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결핍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건 우리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욕망의 존재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일정 부분 결핍되어 있다. 또한 욕망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원으로 작동한다. 다원주의를 살아가는 시대의 자아는 앞서 언급했듯 진리의 상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으며, 따라서 믿고 따를만한 삶의 모범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거나,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는 범주 자체가 보편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원주의의 자아는 언제나 자유로우면서도 항상 불안하다. 이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게 바로 욕망의 충족이다. 자기계발에 힘쓰면, 돈을 많이 벌면, 다양한 쾌락을 충족시켜주면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느낌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그 자체로 목표가 된다.


  이는 언뜻 바람직한 추동처럼 보인다. 모두에겐 공평하게 나름의 욕망이 있으니, 저마다 그것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길이며, 더 행복해지는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이 그 자체로 추구되는 삶은 필연적으로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욕망을 근절할 수 없다. 누구도 완벽해질 수 없으니까. 당장의 행복감, 충족감을 선사하는 것 같은 욕망을 쫓는 삶은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거기엔 오로지 '감각'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완성될 수도, 완결될 수도 없다. 일시적 충족은 감각의 전이만을 추구하게 될 뿐이다. 이는 마치 끝나지 않는 길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경주마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지만, 트랙은 끝나지 않는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몸을 감싸던 바람의 안락함과 속도에 대한 열정은 차차 식어간다. 이윽고 경주마는 걸음을 멈춰 서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끝없이 달려온 길과, 끝없이 달려가야만 하는 길이 존재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년에 이르러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공허감을 느끼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욕망은 그것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을 때, 삶의 전반을 조성하는 가치 있는 지향점을 형성한 상태에서야 비로소 훌륭한 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 지향점은 욕망 자체에서 발생될 수 없는 의미로부터 비롯된다. 그 의미란 이 세상에 대한 건전한 통찰, 인간에 대한 타당한 믿음, 기대, 삶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 인지적 노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추상적 이념이다. 욕망은 이러한 의미에 접속하여 사용될 때만 공허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욕망 그 자체는 추구할만한 성질의 것이 못되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도 기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욕망은 경계되어야 마땅하며, 개개인은 그것에 매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판의 기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