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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Oct 14. 2021

비판의 기술

#30. 비판



  우리는 자주 '차이'를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보지 말고, 다름의 시야로 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의 생각과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라는 소리다. 나와 구별되는 타인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그리고 그 다양한 다름이 사회를 다원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이것이 문화적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사회의 핵심 슬로건이다. 맞는 말이다. 차이가 존중되는 사회는 풍부한 사회적, 문화적 내용과 맥락을 가지게 된다. 이는 사회에게도, 개인에게도 발전의 계기가 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종종 납득하기 힘든, 존중하기 싫은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면 '너는 단지 다른 게 아니라, 틀려먹은 거야'라고 외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서 '차이'를 문제시 삼으면 왠지 죄인이 될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속으론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도로 마무리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게 된다. 


  하지만 틀려먹은 가치관은 분명히 존재한다. 용인되어선 안 되는 차이가 존재한다. 교정되고 수정되어야 마땅한 내용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당신의 분개는 그러한 종류의 대상을 마주해서 생겨난 타당한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분개를 욕지거리와 감정적 수사로 표출하면 인신공격이 된다. 일단 어떤 의견이 인신공격처럼 들린다면, 그가 실제로 느꼈던 타당하고 성숙한 감정조차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분개를 정돈된 언어와 타당한 형식에 따라 표현하면 비판이 된다. 이러한 비판은 타인의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야기하고, 무엇보다도 나의 인격적 성숙에 기여한다. 옳은 걸 옳다고 말하고, 그른 걸 그르다고 말하는 데 필요한 건 용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보다 비판의 기술이 더 절실하다. 덧붙이자면, 이 기술은 감정을 다스리는 데 특히 효과적이다.





  비판의 기술을 익히기 전에 먼저 규명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무엇을 비판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대상의 건전성을 객관적으로 따져 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의 범주는 거의 무한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러한 정의 상에선 [건전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건전성은 그것이 표현되는 언어적 형식과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적 의미가 이치에 합당함을 뜻하는 속성이다. 따라서 건전성을 객관적으로 따진다는 건 대상의 표현과 실천을 비인격적 기준에 따라 평가함을 의미한다. 이를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보자. 타인의 가치관을 비판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타인의 가치관이 내포하고 있는 건전성을 비인격적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말로 표현하는 가치관}과 {행동으로써 보여주는 현실의 실태}가 다양한 대원칙(타인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지, 사회적 통념을 해치진 않는지, 논리의 구조적 정합성을 띠고 있는지 등)에 부합하는지, 또한 그 둘이 일치하여 나타나는지 따져봄을 의미한다. 이 경우 동원되는 이치는 가치관을 평가할 때 사용되는 범주로 한정된다. 도덕적 이치라던가, 사회문화적, 법적 이치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예로 정책을 비판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정책이 내포하고 있는 건전성을 비인격적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정책의 구술적 내용이 적절한 사회공학적 기능을 시사하고 있는지, 국가예산의 동원 정도가 다른 국가적 사안과 비교해봤을 때 합리적으로 산정됐는지, 또한 그 의미론적 기치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원되는 이치는 경제학이나 정치학 등의 사회공학적인 학문의 개념 및 기준과 공공 영역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잣대 등이 해당된다.


  여기서 우리는 건전한 비판의 조건을 도출해낼 수 있다. 먼저, 그 조건 중 하나는 비판에 동원되는 이치의 합당함이다. 어떠한 신념을 평가하는 데 수학적 정합성을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 사회적 사실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 자연과학의 엄밀함을 요구하는 건 다소 비생산적이다. 경영의 효율을 평가하는 데 있어 순수히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건 무용하다. 마찬가지로 윤리적 명제를 평가하는 데 있어 경제적 효용이라는 기준을 논하는 건 초점을 어긋나게 할 수 있다. 당신이 뛰어난 비판가가 되고 싶다면, 그 비판에 적합한 기준 및 형식을 재빨리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이 대상과 무관한 이치를 비판의 도구로 삼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잘난 척의 행태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의사소통 과정에 있어 좋은 비판의 핵심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 분별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판에는 의식적 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흘러가는 대로, 청각 정보가 고막을 때린다는 자연적인 흐름에 사고를 맡겨선 적합한 비판이 나올 수 없다. 오히려 하나마나한 소리가 논의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가장 간단하게 의식적 주의를 전제하는 방법은 상대방의 말을 끊임없이 속으로 요약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에 뒤따라오는 비판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비판의 또 다른 기술 중 하나는 언어의 가치중립성을 지키는 것이다. 당신이 합당한 이치에 따라 정당한 내용의 비판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주관적인 형식을 띤다면 사람들은 당신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가치중립성을 잃어버린 표현은 보편화의 기능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 중 하나'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비판의 개성은 당신의 주관을 표현에 가미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판의 개성은 어디에서 추구되어야 하는가? 그에 뒤따르는 구체적인 예화에서 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 당신이 만약 보편적인 원리나 사실이 전제된 적합한 비판을 가했다면, 그다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판의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예시대상의 내용을 대체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대상의 비판에 대한 공감대를 끌어내는 것이 비판의 설득력을 높이는 유용한 기술이다.


  예시를 제시하는 경우 비판이 이뤄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개인적인 내용일수록 설득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사실이 비판의 가치중립적 표현의 원칙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시에서의 주관적 성격은 그에 선행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의 비판이 현실에서 타당하게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칫 붕 떠서 탁상공론처럼 들릴 수 있는 추상적인 내용에 현실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또는 비판의 대상을 대체할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이는 소위 말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 즉 말꼬리 잡기라는 오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대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 객관화를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대상을 비판하다 보면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그 내용을 스스로 답습하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 '혐오 표현은 규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만약 이에 대해 당신이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보장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비판한다면,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당신의 주장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치에서 어긋나는 사족이다. 즉, 이 경우 당신은 본인의 비판적 근거를 스스로 위배하고 있는 셈이다. 비판하는 과정에서의 지속적인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본인의 비판적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스스로 버리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또 이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지향점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다원주의가 극단화되면 어떠한 차이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상대주의적 관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차이에는 나름의 기준과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건강한 다원주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타당한 비판이 공론화될 수 있는 사회이며, '불건전한 차이'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다. 모든 차이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차이는 검토되어야 한다. 그 차이를 분별하고 논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비판의 기술이다. 이 비판의 기술은 사회를 보다 건전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준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한 명의 탁월한 비판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한 질문

비판의 기술이 어떤 점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데 효과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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