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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Oct 10. 2021

주체성이라는 환상

#29. 주체성(主體性)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주체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주체적인 사람'에서 주체성은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수식하고 있는가? 당장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지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며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줄 아는 성향'일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예컨대 직장 동료들끼리 주식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고 가정해보자. A는 어떤 종목에 투자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이다. 그는 타인의 조언에서 힌트를 얻고자 동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반면 B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는 주식 시장의 현재와 전망까지 줄줄이 꿰고 있어, 동료들의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이 단적인 예시에서 보자면 B는 주체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또 어느 정도는 실제로 그렇다. 반면 A는 의존적이고, 주식이라는 분야에 관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구분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라면 많은 경우에 의존성이 주체성과 대립되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의존성타인의 말이나 선택에 편승하여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속성을 뜻한다. 그런데 만약 의존성이라는 게 그런 것이라면, 주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더더욱 모호해진다. 상술한 예시를 다시 생각해보자. B는 주식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매일 아침 읽어온 경제 일간지와 금융 관련 서적, 그리고 자신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고 있는 주식 전문가들의 조언으로부터 주식에 관한 그의 주체성이 형성된다. B가 미국의 환율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뱉은 모든 말은 오늘 읽은 X라는 경제지의 기사 내용, 그 안에서 사용된 표현들과 거의 일치한다. B가 다른 동료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지적하는 기준은 그가 선배에게서 들은 분석 평가의 기준과 완전히 똑같다. 그가 설파해온 다른 내용들 역시 마찬가지다. B는 주식에 관한 모든 지식, 의견을 타인에게서 구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B를 주체적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A가 B의 말에 전적으로 따라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 역시 A의 주체적 선택이라고 봐야 할까? 특정 주제에 관해 특정 전문가의 의견에 편승하는 B처럼, A 역시 주식이라는 분야에서 B라는 유사 전문가의 의견에 편승하는 것이니 말이다. 아니면 둘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걸까? 결국 궁극적으로 대답되어야 하는 질문은 이렇다. 주체적이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주체성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주체성이라는 용어에 씌어진 환상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우선, 주체성은 종종 '어떠한 외부 사실이나 의견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의지를 관철하는 성정'을 뜻하는 것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선 그렇다. 이러한 종류의 주체성은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혀 야만적인 행태를 일삼는 개체에게서만 가능하다. 그는 내적 욕망에 매몰되어 환경이나 주변의 다른 개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욕구 충족만을 위해 강력한 의지를 발휘할 것이다. 그의 성정은 상술한 정의에 부합하지만, 그를 주체적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는 욕망에 대항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그는 선택할 수 없다.


  다른 맥락에서, 주체성은 '모든 것을 자신의 이해에 따라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자신의 분별력을 이용해서 특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뜻한다. 이 같은 정의는 어느 정도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굳이 문제를 삼는다면, 우리는 그의 분별력 자체를 의심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심리적으로 세뇌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스스로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어떠한 선택을 하는 데 있어 본인의 의지로 사태를 분별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는 주입된 가치관에 좌우되어 무언가를 판단할 따름이다. 굳이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아도, 이러한 케이스는 일상 속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대단히 확신에 차서 옳고 그름을 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어떤 사태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확증 편향 속 분별력은 자기기만적이어서, 본인은 스스로 주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주어진 세계관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주체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트집 잡는 건 이쯤 하도록 하자. 핵심으로 들어가, 우리는 주체성을 '지성적 부분'과 '감성적 부분'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성지식에 관한 일반적 성향 및 능력을 뜻하며, 여기선 분별력이나 이성과 같은 지적 성질에 관한 맥락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감성이라는 말은 감수성과 동일한 뜻을 가지는데, 개념이나 경험 등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감정적 지반을 뜻한다. 이러한 구분이 왜 필요한가? 지성적 주체성과 감성적 주체성의 의미, 구성, 실천적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양면의 주체성은 상호보완적이어서, 어느 한쪽만 가지고 있는 경우엔 온전한 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지성적 주체성의 의미는 그것의 반대 사례를 검토함으로써 더 명확해진다. 배우려 하지 않고, 자신의 협소한 경험에 매몰되어 옳고 그름을 강요하며,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매사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비록 타인의 지적 내용에 의존하지 않지만, 지성적 주체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오히려 배움과 타율, 지식의 흡수 따위가 필요한 영역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생애는 기껏해야 몇십 년인데,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실이나 진리, 지식이나 지혜 등은 그를 훨씬 뛰어넘는 아득한 밀도를 가지고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짤막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꾸준히 무언가를 배우고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매사에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실천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다. 요컨대, 지성적 주체성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겸손'이다. 겸손함은 사람이 지적으로 협소한 영역에 갇혀 있지 않을 때나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체성이라는 속성을 조명할 때, 보다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은 감성적 주체성이다. 사실 지성적 주체성은 이 감성적 주체성의 기반 위에서 지식이나 경험, 배움이 '어떤 식으로 종합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감성의 구성 요소로는 개인적 경험, 감정, 선천적 기질, 후천적 특질[캐릭터화, 전형화(典型化)] 등이 있다. 감성은 이러한 구성 요소들을 토대로 사물이나 지식을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 다른 감정적 스탠스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지적인 내용은 사람의 감성적 지반 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화되기 때문이다.


  감성적 주체성은 후천적 특질 부분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경우에 훼손된다. 또한 그 외의 요소에도 지나치게 편중되면 독단에 빠져 지성적 주체성까지 훼손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개인적 경험에 매몰되면 '꼰대'가 되고, 감정에 매몰되면 '미성숙한 사람'이 된다. 선천적 기질에 매몰되면 '고집불통'이 되고, 후천적 특질에 매몰되면 '정신병자'나 '어색한 자아', '작위적인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이들 요소 간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 조화된 감성은 경험적인 내용을 마땅히 요청되는 감정과 어우러지게 하고, 그 감정은 선천적 기질에 따라 조성되는 스펙트럼에 맞추어 발휘된다. 후천적 특질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에 부합하게, 혹은 사회적 측면과 본인의 성정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화된 감성의 종합 위에서 흡수되는 지식, 타율, 바깥의 견해는 고유한 방식으로 검토되어 '주체화'되고, 자아를 발전시킨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감성적 주체성의 '발전'이다. 지성적 주체성의 발전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다양한 견해를 수렴함으로써 겸손을 유지하며, 매사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별력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그러한 발전으로 여겨지니까. 따라서 지성적 주체성의 탁월성은 특정한 방식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감성적 주체성은 얼핏 보기에 저마다 감정적 스탠스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 간의 객관적인 우열을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다면, 어떻게 발전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혹은 감성에도 우열이 있는가?


  이에 가능한 한 가지 대답은 감성의 종합이 그가 처한 환경에 적응도를 높이는 게 발전이라는 답변이다. 덜 스트레스받고, 더 행복하게 환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감성의 틀이 조정되는 것이 그 발전이라는 것이다. 또는 지성적 주체성의 탁월성을 보다 잘 형성할 수 있도록 그 지반을 다져가는 게 감성적 주체성 발전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똑같은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서도 누군가는 다양한 영역으로 연결하여 그것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실제 경험에 비추어 실천적으로 그 지식을 적용시킨다. 반면 누군가는 '그런 걸 어디에 써먹어?' 라던가, '내가 옛날에 배운 건 그게 아닌데?' 라는 식으로 배움과 생각의 진전을 거부하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 직관적으로 봐도, 전자가 후자보다 더 탁월한 감성적 지반, 인식적 수용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더 잘 받아들이고, 더 잘 소화하며, 더 잘 느낀다. 삶이 더 풍부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건전한 주체성이란 지성과 감성의 주체성이 상호보완적으로 발휘되는 주체성이다. 즉, 주체성은 개별적인 어떤 하나가 아니라 '종합된 결과'이다. 이는 지적인 겸손함과 감성의 고유한 지반을 형성하는 데 달려 있으며, 그 길은 적극적인 학습 의지와 감성적 요소들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데 있다.


  어떠한 맥락에서도 유리된 자아, 자신이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기는 자아는 주체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헤매고 있을 뿐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역사적 거부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유령적 자아를 양산했다. 그래서 현대의 유령적 자아는 타인의 인정에 목맨다. 왜냐하면 그에겐 역사적 맥락도, 삶의 필연성도, 발전시킬 주체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존재하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며, 현재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시선뿐이다. 한때 그러한 가치관이 'YOLO'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나는 그들이 불행하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에 귀속된 존재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한 역사적 존재다. 그러한 전제 위에서 논의되는 주체성을 거부하고, 자유와 '현재의 행복'에만 목매는 환상의 주체성은 일시적 쾌감과 그에 뒤따르는 깊은 공허함을 마주하게 될 뿐,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할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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