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 Oct 02. 2021

알을 깨고 나온 정신

#28. 시대성(時代性)


  가끔 20세기 중후반에 나온 책들을 읽을 때가 있다. 혹은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책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읽다 보면 종종 깜짝 놀라곤 한다. 지금까지 내가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내 소박한 일상 속의 사유 속에선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어떤 저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놀라운 통찰로 연결되기도 하고, 미래상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예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당시의 미래상이라고 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일 텐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예견들이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이 그러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논리의 전개 과정을 배운다. 지식을 실천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또 가끔은, 내가 그 과거의 유산에서 배운 내용이 매우 특별해서 나의 실제 삶의 궤적이나 가치관이 유의미하게 변화할 때가 있다. 책 속의 어떤 주장은 너무나도 설득력 있거나, 혹은 유용하다. 나로선 그러한 경험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에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낀 깨달음, 생산적인 배움의 내용들이 몇십 년 전부터 이미 세상에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횡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외심을 느낄만한 아름다운 이론을 몇 천 년 전의 글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당장의 인생에서 어제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오늘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었던 변혁의 재료들이, 어떤 사람들의 세계에선 너무나 당연하고 심지어 기초적인 지적 기반이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인류 지성사에 있어서, 혹은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도 특별히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이다. 우리 대부분은 언젠가 '내가 왜 그때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나는 왜 과거에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성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탁월한 지적 성취의 순간은 동시대의 타자에게 번뜩이는 성찰을 야기함과 동시에, 다음 세대를 살아갈 이들에게 상식의 지반을 제공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지적 혁신이 상식화 되어 당연한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대단히 점진적이어서, 적어도 세대의 교체가 상당한 정도로 발생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그 사이에서 소위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면(面)을 가꾸고 사회적 주체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배움의 각오를 다져야만 그 같은 번뜩임의 순간을 향유할 수 있다.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는 경외심과 접속의 문제다. 그렇기에 비상식과 몰상식은 다르다.


  상식은 아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모르는 것, 필요하거나 배워 마땅한 상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나는 둘 사이의 어떠한 당위를 구별하며 반성을 요구하려는 건 아니다. 요컨대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은 스스로 겸손하고 정진하여 합리적인 상식을 익혀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시대의 지식, 다른 시대의 가치관, 다른 시대의 상식을 이 같은 잣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지식, 가치의 종합을 '시대성'이라고 규정해보자. 이에 가능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성에 너무 매몰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령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시대성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살고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대적 상식은 과거의 어떤 것들과도 견주어 볼 때, 역사의 가장 첨단의 것이자 최대의 정합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시대가 현대이기 때문에, 현대의 시대성에 적응하며 사는 것은 당연할뿐더러 심지어 마땅한 태도처럼 보인다.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성실함의 미덕으로 합의보지 않았나?


  전체적인 결론에 앞서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시대성'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이다. 예컨대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중', '국민'과 같은 개념을 접한다.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타인'이나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그 같은 지시어는 어떤 집합을 통칭하는 말이고, 또 그 통상적인 맥락은 어떠한 기능과 목적을 포함하고 있는가? 많은 기사에서 전국의 천 명가량의 무작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국민 정서'를 가늠하는 지표로 사용한다. 블로그의 글이나 유튜브의 영상에선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모를 타자를 설정하고 그들을 비판함으로써 어떠한 국민성이나 그가 속한 집단성을 깎아내린다. 그리고 그 같은 컨텐츠의 댓글들에선 서로의 진영에 속하지 않는 반대파의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나 비하적으로 규명한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에는 이미 사람들의 조작적 의지, 권력에 대한 욕심이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작금의 시대성이라고 규정하는 데 있어 동의하는 성질들 또한 그러한 권력의 독점을 위해 설정된 작위의 결과일 수 있다.


  또 다른 대답으론 시대성의 연속성에 있다. 특정한 시대의 성질은 그것의 과거와 단절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명확한 기준은 없으며,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명확한 특성 또한 없다. 서양에서의 역사 구분 기준이 동양에선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의 발전 과정은 제3세계 국가들의 그것과 상이하다. 그 말은 당신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든 간에 그 시점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과거의 혁신에서 연원한 것이며, 그 과거의 혁신은 다른 지역,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는 뜻이다. 그러한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시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적절한 적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에 적응한다. 하지만 무비판적인 순응만이 적응의 유일한 방식은 아닐뿐더러, 최선의 방식도 아니다. 이에 관해선 나치 시절의 독일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대체로 그러한 태도는 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소극적인 방종이다.


  정리하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시대성은 모호하고 연속적이어서 명료하게 분별되지 않는다. 과거의 시대성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역사를 마주하고 해석한다. 누군가에게 서양의 중세는 암흑시대고, 누군가에겐 종교적 성찰에서 비롯된 지적 성숙의 과정이다. 누군가에게 한국의 근현대는 기적으로 대변되는 가파른 경제 성장의 온상이고, 누군가에겐 억압과 탄압이 혼재된 부정의 역사다. 시대성은 타파되지 않고, 다만 발굴되거나 경시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양한 시대성을 발굴하고 익혀가야 하는 이유는, 작금의 시대성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지양해야 하는 태도인 이유는 1) 우리에겐 반성적 교차검증의 지적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2)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소질을 풍부하게 개발하기 위해서다. 각기의 시대성은 조작되거나 은폐될 수 있지만, 그들 간의 흐름이나 항목의 전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상이한 집합들 간의 교집합이라는 공통분모를 파악하는 것처럼, 인간사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 인간의 소질은 제한된 시대성 속에선 제한된 수준으로만 개발될 뿐이다. 이를테면 과거의 서양에선 결투라는 시스템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명예를 걸고, 약속된 규칙 하에 싸우는 것이다.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명예의 관념을 21세기의 시대성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그 같은 관념적, 정서적 확장은 우리가 속해 있는 시대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지적 체험의 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는 창조적 자기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과거에 대한 다층적인 고려와 이해는 미래의 복합적인 가능성의 실현에 대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시대성이 존재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시대상이 불변의 진리를 모사하고 있는 게 아닌 단지 지나가는 흐름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 감각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그러한 인지적 태도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데, 당장의 슬픔이나 고통, 혹은 내가 나의 과거에 결론지은 해석이나 감정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될 수 있다. 그에 따라 우리네 삶의 미래 또한 다양한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고, 또 무수한 행복의 지평을 전망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 대한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