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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Sep 25. 2021

'나'에 대한 태도

#27. 자신감, 자존감.


  정신승리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이라고 안 쓰이는 단어는 아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든 현실 주변에서든 정신승리라는 말이 이상하리만치 남용되던 시기가 있었다. 모든 자기만족의 천명이 게으름과 비겁한 현실 안주의 표명처럼 여겨졌고, 탈세속적인 지향점은 현대 경쟁 사회에서 패배한 이들의 대안적 방식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정신승리라는 말의 근저에는 통념적인 관점에서 열패감이나 열등감을 '느껴야만'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거나 평안한 상태인 것처럼 보일 때, 그 괴리감을 조롱의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승리에 관해 '현실의 비참함을 상상의 나래 속에서나마 극복하려는 망상적 발버둥' 정도로 정의하리라.


  나는 거기서 사람들의 불안함, 두려움을 느꼈다.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시대,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섣불리 의지할 가치관도 모호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쩌면 불행의 척도라도 바로 세우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비참하고 불운한 삶의 양태를 규정하고, 그것만은 피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그래서 불행의 전형 속에서도 불행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너희들의 생각이 잘못된 거라고, 너희는 비참하고 괴로운 상황임에 틀림없지만 진실에서 눈을 돌리며 정서적으로 회피하고 있을 뿐이라고 끝없이 강조한다. 정신승리라는 말을 남용하는 사람들은 사실 누구보다도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다르다는 건 흔하게 들리는 말이다. 확실히 믿음과 존중이 다르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를테면 우리는 타인의 종교를 같이 믿을 순 없어도, 그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할 순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믿는 것과 나를 존중하는 게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 이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자존감은 낮을 수 있고, 반대로 자신감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자존감은 높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같은 대조는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외유내강이라는 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성향과 내면의 성향 간의 차이를 시사하는 걸까? 혹은 미리내와 은하수처럼 같은 지시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걸까?


  자신감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뒤따라오는 말이 있다. 바로 근거다. 사람들은 근거 있는 자신감과 근거 없는 자신감 사이의 차이를 주요한 쟁점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용되는 근거란 무엇인가? 대개 그의 과거 행적, 업적 등 성취에 관한 내용들이다. 가령 축구에 자신이 있다는 말은 과거에 축구를 하면서 좋은 플레이를 해왔거나, 관련 입상 성적을 가지고 있거나, 축구에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에게 칭찬을 들었을 경우 정당한 태도로 취급받는다. 이때 축구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반면 축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던가, 지금까진 못했지만 오늘은 잘할 것이라던가 하는 종류의 자기 믿음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의 성취가 기반되지 않은 자신감은 아무리 강렬한 확신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신감은 과시적 성격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반면 자존감에 대한 얘기에서 근거를 찾는 경우는 없다. 자존감이 높다는 말은 대개 상황이나 감정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타인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의 성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자기 존중은 과거의 업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수많은 성취를 토대로 충만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존감은 낮을 수 있다. 반면 별다른 성취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자존감이 높을 수 있다. 이 차이는 믿음과 존중이라는 키워드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모든 믿음은 합리화를 필요로 한다. 설령 믿음마다 그 합리화의 정도가 다르고, 사용되는 근거의 기준에서 요구되는 엄격함은 다를지언정, 그것은 일정 수준의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만 성립한다. 그래서 나에 관한 믿음이 무엇보다도 과거의 성취에 좌우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위에서 속된 말로 쥐뿔도 없으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한다. 이들은 자신을 믿는 게 아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본인의 선택의 가치를 과장하려 든다. 근거를 통해 합리화된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의 업적이 시사하는 스펙트럼의 정도에서 자신감을 가지거나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자기 믿음은 필연적으로 과시적이지만, 과시적이라고 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 지점을 포착하는 것이 사람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안목이다.


  존중은 믿음과 다르게 합리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중은 특정한 주관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A에 대한 존중은 A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나고 자라면서 다양한 종류의 가치 평가를 경험한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부터 시작해서 선호와 불호, 옳고 그름, 미추나 합리성에 관한 평가 등 사람들은 너무 많은 기준에 노출되어 있는 나머지, 대상을 바라볼 때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적용시킨다. 존중은 이 같은 평가적 기준들에서 벗어나 대상을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어째서 내적 안정을 도출하는가? 내가 나를 평가적 기준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그것의 가능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비교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간단히 말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나와 타인을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잣대를 사용한다. 돈이 많고 적음, 학업의 성취도, 경력이나 심지어는 선함의 정도까지, 나를 나 자체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나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인 단일한 척도를 토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항상 흔들리기 쉽고, 자신을 비하하며, 타인의 시선에 매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 운동을 못하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못 배웠으니까', 하는 식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절망에 빠진다. 반대로 다른 모든 면에선 떨어지는 데 돈이 많다는 이유로 '나는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 또한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발생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나머지 단일한 척도에 비추어서만 자신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에 반감을 가진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어쨌든 타인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사회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상호 작용 가운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자존감에 관한 논의는 비현실적인 방향성을 지시하고 있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상술한 내용에 따라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감이 높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승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논의는 어찌 됐건 한쪽의 인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납득할 의향이 없다면, 결국 자존감에 대한 논의는 챗바퀴를 돌뿐이다. 자존감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취를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거기에 뒷받침될만한 업적이 있다면, 자존감이 낮아도 높은 자신감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는 퍽 숭고한 삶의 태도를 시사한다. 그야말로 '장인 정신'인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삶은 너무 어렵다. 어깨에 힘을 빼고, 조금 더 여유를 가지며 살라는 선조들의 지혜는 경쟁에서 도태되든 말든 정신승리로 삶을 꾸려가라는 게 아닌, 그 숭고하고 어려운 길을 즐겁게 걸으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 가능한 질문 ]

자신감은 특정한 성취에 관한 것이고,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분의 기준'에 따른 '특정한 성취'에 대해 자존감이 반응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자신감과 자존감은 양립하여 발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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