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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Aug 22. 2021

증명될 수 없는 마음

#26. 설명, 증명.


  설명은 A와 B 사이의 연결고리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말은 가령 말과 행동 사이,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 사건과 사건 사이를 연결해줄 만한 정보나 그것을 이해할만한 청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경우 설명은 숨겨진 전제를 규명하거나 새로운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혹은 그가 놓친 A와 B 사이의 간격을 재조명해줄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설명의 종착점은 납득이다. 이는 납득할 수 없다면 어떠한 진리를 가져다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설명이 필요한 것',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게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납득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비합리적인 설명이라도 제기능을 적절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증명은 설명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증명은 설명의 방식 중 하나지만, 단순히 A와 B 사이의 연결고리를 구성하는 것만으로 증명이 되진 않는다. 증명은 그 연결고리를 논리적, 경험적 근거에 따라 보다 엄밀하게 규명하길 요구한다. 따라서 단순히 주관적 믿음에 따라 사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나, 그럴듯해 보이지만 명백한 근거는 없는 서사를 제시하는 건 무언가를 증명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아무리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부분의 음모론은 사태나 특정 조직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일 순 있어도, 그것들이 무언가를 증명했다고 볼 순 없다. 증명의 종착점은 납득이 아니다. 증명은 어떠한 설명을 비인격적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사실이라 판명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증명의 종착점은 진실이다. 진실은 누군가의 납득에 의존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설명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고, 그것은 증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증명은 그것이 실현된 시대의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당대의 증명들이 시간의 시험대 위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수정되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증명'의 지위가 폄하될 필요는 없다. 증명은 여전히 진실을 규명하는 설명 방식 중 가장 설득력 있고 신뢰할만한 방식이다. 게다가 시대가 발전할수록 무언가를 증명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검토하는 방법 역시 발전한다. 현대에 이르러 무언가가 증명됐다는 건, 엄격한 비판과 시험의 과정을 거쳐 진실로서 판명 났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당연히 이 경우 증명은 통상적인 의미보단 학술적인 의미에서의 그것을 지칭한다.





  아마 이 차이는 예시를 통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은 증명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사랑은 특정한 방식으로 설명될 뿐인가? 여기서 문제 삼는 건 사랑이라는 개념의 실재 여부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특정한 반응 양식, 그러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각각의 개별 사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면 사랑에 대한 확신은 점점 더 모호해진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진정한 사랑, 죽음마저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사랑의 사례 역시 접해왔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많은 빈도로 발생하는 사랑의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 단적으로 현대의 거의 모든 연애는 실패한다. 여기서 실패란 사랑이 장기간 지속되는 결혼 생활이나 노년 생활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단념되는 경우를 말한다.


  개별 사례 속의 사랑이라는 사태가, 그 관계가 상당 부분 불분명하고 모호하다는 사실에 대해선 충분히 말한 것 같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내가 밝히고 싶은 내용은 상술한 '설명'과 '증명'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 혹은 상태가 '진실'로서 판명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랑은 증명될 수 없다. 그건 나의 사랑도, 당신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논의가 현재 연인 관계에 속한 사람들, 혹은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경험해본 사람들에겐 다소 비현실적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사적인 연인이나 부부, 혹은 부모·자식 관계나 기타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속해주는 것처럼 여겨지는 도식 구조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실천에 관한 의심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납득'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가?


  사랑의 언어는 진실한 사람의 입에서건 사기꾼의 입에서건 똑같이 나온다. 사랑의 몸짓은 정직한 사람에게서나 기만자에게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특정한 방식의 연극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이제 일반적인 상식이다. 우리는 타자를 마주할 때 상황과 관계에 맞게, 특정한 행동 양식을 내보인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상황과 관계에 대한 설명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공통의 납득을 토대로 '마치 그러한 것처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상호 작용의 본질이라면, 사랑 역시 그러한 기만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이에 혹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에게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건 너무나 사적이고 감정적인 도식 구조인 탓에, 굳이 비인격적인 기준에 호소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을 실감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설령 사랑이 진실로서 증명될 수 없고 단지 서로의 납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설명될 뿐인 것이라 해도, 그 사실이 사랑의 가치를 떨어트리진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사랑이 증명의 대상인지 설명의 대상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중요치 않다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가정적으로 제기된 첫 번째 반론은 여전히 그것이 착각일 가능성, 혹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기만의 징후를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엄밀한 주장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사랑의 실패나 그것의 부재에서 야기된 두려움에서 비롯한 방어적인 논증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 혹은 어느 정도는 상대방이 나를 기만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완벽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신화라면, 결국 사랑이라는 건 모두 불완전함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 활동이자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그런 종류의 당위나 사랑의 현실태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이 문단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컨대 설령 당신이 필생의 사랑이라고 여긴 감정이 실은 병리적인 정신 상태에서 비롯된 질환의 증상일 수 있고, 혹은 상대방의 사랑 표현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기만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까지고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가능성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또 다른 정합적인 설명 방식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설명과 다른 설명 사이에 존재하는 가능성의 차이를 합리적으로 제거할 수단이 없다면, 사랑에 대한 당신의 강렬한 실감은 증명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상술했듯이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불완전한 인간에서 파생된 불완전한 현실태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하고, 또 그것을 추구한다. 그 이유는 사랑의 가치나 목적이 그것의 증명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사랑은 단지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설명'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 이후엔 그저 사랑이 주는 효용을 향유하는 것으로 족하면 그만인 것이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가정하며 유용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은 인간 사회를 작동시키는 핵심적 원리다. 사랑이라고 그 원리를 적용시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우리는 '일반적인 연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답습함으로써 서로의 연극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사회적인, 혹은 문화적인 '사랑'의 정의에 따라 사람들은 얼마든지 사랑을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적어도 나의 논지에선 벗어난 것들이다. 이 문단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여전히 사랑은 증명될 수 없다.





  끝으로 사랑이 설명의 대상인지, 증명의 대상인지 구분하는 작업이 무용하다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이 실은 아무런 비인격적 기준에 호소할 수 없는 착각과 기만의 온상이라 밝혀지더라도, 어떤 사랑도 진실이 아닌 주관적 납득의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음모론' 같은 것이라 판명돼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을 하고, 또 그것을 추구할 것이다. 사랑은 종식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어쩌면 유의미한 태도의 변화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나의 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여, 사랑을 '진실로서 증명될 수 없고 오직 다양한 방식의 설명을 통해 서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라고 규정한다면 어떤 변화가 야기되는가?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그저 우리가 상대방에게 더 많은 설명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이 표현하고, 더 자주 확인하고, 서로의 기대와 요청에 응답하며 끊임없이 설명하는 과정이 사랑인 것이다. 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납득의 정도를 강화하고, 증명할 수 없는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간주함으로써 동일한 상상력을 공유하는 것, 이것이 사랑을 실천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자 이상적인 방향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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