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거시담론, 혐오.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편의상 그 누군가를 A라고 하자. A가 말하길, 본인이 어떤 인터넷 뉴스 기사를 읽고 그 밑에 달린 댓글을 보는데, 참으로 가관이었다는 것이다. A가 본 기사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의혹'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댓글란에는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도 없는 기사 내용만 가지고, 말하자면 그 정치인에 대한 불확실하고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수 천 개가 넘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고 한다. 그걸 보고 A는, 그 당시의 말을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우리나라 대중의 시민의식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덧붙여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그런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사례를 접한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유튜브나 SNS,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런 경험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5분 내외로 짜깁기 한 의혹 제기 영상을 보면서 이때다 싶어 손가락질하고, SNS 상의 몇 문장 되지도 않는 '카더라 통신'의 소식을 듣고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보며 여론의 수준이나 대중의 지적 능력을 가늠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생각이 짧다거나, 요즘 사람들은 문장 독해력이 떨어진다거나, 요즘 사람들은 혐오 감정에 매몰되어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거나 등등.
당신은 앞선 A의 경험담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내가 당시 A의 말을 들으면서 했던 생각은, 당신도 그 기사에 섣불리 댓글을 단 수 천의 사람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두 가지 맥락에서 그렇다.
첫 번째로, A는 자신이 상정하는 특정 댓글러의 지적 수준이나 성격적 결함을, 자신이 본 댓글 하나를 근거로 도출하고 있었다. A는 단편적인 정보만 모아둔 기사 속 정치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댓글러의 댓글 하나라는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그에 대한 인상을 확정하고 있다. 어쩌면 그 댓글러는 그날 유독 기분이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기사 속 정치인의 비리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다양한 통계적 기법을 응용해 팩트를 검증할 줄 아는 전문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철없는 학생이었을 수도 있고, 여론전에 능한 속칭 '댓글부대'였을지도 모른다. 즉, A는 댓글러가 누군지 모른다. 그가 아는 건 고작 댓글 하나의 내용뿐이었다.
두 번째로, A는 특정 사회에 속하는 '대중'의 지적 역량을 고작 수 천의 댓글로 가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유권자 수는 사천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편향된 기사에 댓글을 등록한 편향된 사람들 몇 천 명의 의견으로 '요즘 사람들'을 운운하는 건, 기사 속 몇몇의 의혹만을 가지고 그 정치인의 생애와 인간성을 조망하는 댓글러와 다를 바 없는 행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봐도, 특정 진영에 속한 정치인의 의혹을 모아서 선전하는 기사에 적극적으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반대 진영의 사람들이리라. 그 현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A의 판단 잣대는 애당초 잘못된 사고방식에 기인하고 있다.
요컨대, A의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아마도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그 결심의 시작에서부터 그는 자신이 비판했던 이들과 똑같은 태도를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우리나라 대중의 시민의식이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A나 다른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얕아지고 있고, 글을 읽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A의 결론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판단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모른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A가 어쨌든 정답을 말했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다소간의 실수가 뭐가 그리 문제란 말인가? 이를 '혐오'라는 주제와 연결해서 생각해보자. 오늘날 사람들은 '혐오의 시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물론 나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에겐 이러한 질문이 바보 같이 들릴지 모르겠다. 현대인들이 혐오 담론에 매몰되어 있는 건 너무나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당장 인터넷에 몇 가지 키워드를 검색하기만 해도, 양극단으로 나뉘어 서로 반대 진영의 사람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일삼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사람들은 조롱이 쿨하다는 괴상한 가치관을 추종하느라 찌질한 너스레를 반복하고 있다. 특정 성별이 싫다거나, 특정 계층에 대한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시글에 '좋아요'가 수 천, 수 만개가 달리는 실정이다. 이 이상 혐오가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또 있을까?
당신이 기억해야 할 건, 또 우리가 항상 염두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무리 웹서핑을 주구장창 해봐야 볼 수 있는 게시글, 댓글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의 등록된 유권자 수가 사천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투표 가능 인구수를 아는 게 상식적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대중'이라고 상정하는 성인 남녀의 수가 그쯤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활발히 인터넷에 접속하는 청소년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어떤 인터넷 게시글에 '좋아요' 십만 개가 달려 있다고 치자. 혹은 백만 개도 좋다. 이 글에 반영된 여론 정서는 우리나라 대중의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40명으로 이뤄진 학급에서 한 명이 수업 중에 쌍욕을 퍼붓고 기물을 파손했다고 치자. 이 한 명의 행태가 해당 학급의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심지어 백만이 넘는 사람들의 지지가 표현된 내용은 극히 드물다. 웹서핑을 조금만 해봐도 알겠지만, 조회수와 의견 표출의 비율은 극단적이다. 어떤 게시글을 백만 명이 봐도, 거기에 달리는 댓글은 아무리 많아봐야 몇 만 정도다. 자, 이제 이런 당연한 사실을 토대로 우리나라 대중의 정서적 특성을 도출하려 해 보자. 도대체 몇 개의 게시글을 봐야, 몇 개의 댓글을 읽어야 오늘날 사람들이 유달리 혐오 정서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기계적으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검토해도 하루에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수는 천 개가 넘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 안에 달려 있는 댓글의 내용만 일일이 파악하려 해도 만 개를 못 넘길 것이다. 하물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관심 있는 주제에만 접속하거나, 지엽적인 사례만 늘어놓는 SNS 상의 포스트를 눈팅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오늘날 한국 사회가 '혐오 사회'라는 주장의 근거를 찾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우리가 혐오에 찌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종류의 칼럼, 기사들이 검색 결과에 즐비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비판적으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지 구조를 나 역시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게시글이나 댓글을 뒤져봐야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무슨 근거로 "사람들이 '혐오의 시대'라는 착오적 담론을 재생산하며 맹신하고 있다"라고 자신하냐고 말이다.
이 글의 목적이 '혐오의 시대'라는 키워드가 허상이라는 데 밝히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시 구조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비일관적이고 섣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실제로' 혐오 사회일 수도 있다. 이는 상술한 A의 사례에 대한 결론을 말하면서도 덧붙인 형태의 가능성이다. 이제 이 가능성의 의미와 '혐오의 시대'라는 담론이 언론이나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실태를 연결해보자.
문제의 구조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려 한다. 그전에 당신은 '자기 충족 예언'이라는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재무 상태가 아주 건실한 어떤 은행(X 은행)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별안간 X 은행이 조만간 파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물론 이 소문은 거짓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길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진 나머지, X 은행에 예치해둔 돈을 모두 인출해갔다. 그 결과, X 은행이 실제로 파산했다. 처음엔 헛소문이었던 것이 사실이 된 것이다. 자기 충족 예언이란 대충 이런 것이라는 이해만을 가지는 것으로도 족하다.
사고 실험으로 돌아와, 어느 날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위 말하는 '혐오를 부추기는 글'을 인터넷 상에 올리기 시작한다. 젠더 이슈, 정치 진영 이슈, 장애인 혐오, 빈부 격차에 대한 갈등을 조장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게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걸 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테면 몇십 명 남짓의 네티즌만이 이에 슬며시 동조하거나 똑같은 종류의 글을 게시한다. 그런데 섣불리 판단하기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혹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우연히 그런 글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들은 안 그래도 처음에 올라온 혐오 조장 글을 보고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와 비슷한 한 두 개의 게시글을 더 보고 나니 '요즘 사람들은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시간이 지나고 혐오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러나 늘었다고 해봐야 수 천 명 남짓이다. 우리나라 유권자의 수, 학생을 포함한 잠재적 인터넷 사용자의 수를 염두에 두자. 전체 인구에 비추어 볼 때, 아직까지도 혐오에 환장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섣부른 사람들'이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혐오를 부추기는 거지? 물론 섣부른 사람들의 의도는 대체로 선하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 눈에 띈 몇 개의 혐오글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경험담에 비추어, 그러나 마치 그것이 일반적인 현상인 것처럼 혐오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상술한 A의 사례를 생각해보라. 그들의 눈에 오늘날 사회는 '혐오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점점 혐오라는 주제에 대해 일반화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관심도 없던 이들까지도 분탕질을 위해 혐오 쟁점에 참여한다. 정의로운 관념을 가졌지만 섣불리 판단하는 사람들도 점점 이 주제에 대해 한 두 마디 씩 거들고, 그 수는 극히 드물지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즐기는 혐오주의자들이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들의 역할, 포스팅하는 게시글이나 댓글은 전체 규모에 비해 극소수지만, 그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별걸 다 혐오한다'고 생각하는 '섣부른 판단자'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
사태가 이렇게 확장되니, 사회적 이슈를 조장하길 좋아하는 몇몇 언론이나 유튜브 채널에서 사태를 과장해서 보도하기 시작한다. 이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갈등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혐오 담론'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회사에서 동료들과, 가족이나 연인과 지나가듯 그런 얘기들을 꺼낸다. 그리고 그 상대 중에는 열성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이 열에 한 둘은 끼어있고, 그들은 마치 혐오라는 주제가 인터넷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듯이 열변을 토해낸다. 일하는 틈틈이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게시글의 수는 백 개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저 소박하게 웃길 좋아하는 누군가, 도덕적 판단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누군가는 옳다구나 하고 이 이슈를 농담의 소재로 삼으며 희화화한다. 진지한 주제가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걸 보기 싫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도 비판을 일삼는다. 이제 온 세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혐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고 실험 속 사회는 '혐오 사회'가 됐다. 여전히 극단적 혐오주의자는 극소수지만 혐오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섣부른 판단자'들은 타인의 말 한마디에, 사소한 행동 한 두 개에 '혐오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사고 실험 속 사회의 사람들은 건수만 잡히면 인종차별자, 성차별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사회가 진정 '혐오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실감하게 된다. 정의로운 자들은 혐오글 하나를 보고 혐오에 반대하는 댓글 수 십 개를 단다. 인터넷은 온통 혐오에 대한 얘기로 가득해진다. 이른바 '혐오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제 A의 결론이 사실일지라도, 그가 저지른 판단 과정상의 결함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명확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섣부른 믿음은 그 믿음을 스스로 사실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사람들이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형성한, 거시 세계에 비추어 볼 때 정말 몇 안 되는 단편적인 순간과 정보를 짜깁기해 만든 허구적 세계관이 스스로 그 세계를 구현해나가는 것이다. '혐오의 시대'라는 자기 충족 예언은 이렇게 실현된다.
이는 속칭 '혐오 담론'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당신은 사회가 어떻다느니, 대중이 어떻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말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시대를 규정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시대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가 그렇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의 알량한 경험을 근거 삼아서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거시적 담론이 헛소리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의 건전성이다. 그를 위해 유용한 도구 중 하나는 언제나 그 주장이 설명하고 있는 전체 규모를 인지하는 것이다. 대중 비판을 하는 자들은 언제나 그 '대중'이라는 단어가 포괄하는 설명력이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관에 갇혀 독단에 빠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시 담론을 접하는 사람들 역시 그 담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범위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설득력을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담론만 추종하는 광신도가 되거나, '어떤 담론도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라는, 지적 무능에서 비롯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