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추상성.
'추상적이다'는 말이 애매하다, 모호하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논평하거나 비판할 때, 추상성이 어떤 흠결인 양 그것을 지적하곤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당신의 글은 다소 추상적인 것 같다'는 감상은 '나는 당신의 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속뜻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구체적인 예시를 제공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그 같은 설명방식이 내용 구성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예시를 첨부하는 것은 전달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으나, 그 추상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길일 수 있다. 할 말이 없거나 주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불필요하게 주절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담고 있는 추상성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예시는 조악한 동어 반복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화자에 대한 인상이 부정적으로 형성되면, 그 글 전체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문제라면 문제인 것은, 추상성은 글이나 기타 작품에 단점으로 작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당초 '추상성'의 일반적인 용례가 그러하듯, 이 단어의 뜻은 애매함이나 모호함이 아니다. 추상은 다양한 개별 사례로부터 그들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일반적인 함의를 이끌어내어 표현한 것이다. 즉, 추상적인 무언가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그러나 불필요한 개별 사례의 나열을 생략한 결과다. 그래서 진리는, 그런 것이 있다면, 필히 추상적이다.
물론 사람들은 개별 사례, 구체적인 예시를 들을 때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실제로 추상적인 무언가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이 예시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진리는 필히 추상적이다. 달리 말하면 만약 당신이 어떤 개별 사례 하나로부터, 특정한 예시 하나로부터 어떤 명징한 깨달음이나 경외감 같은 걸 느껴 '삶의 진리란 이런 것이다', '세상의 진리란 이렇다'라고 생각했다면, 대체로 그 생각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주로 철학적 경구를 접하거나, 현실에서 매우 정서적인 경험을 했을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명제를 보고 무릎을 탁 치거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시인한다. 물론 철학적 명제는 대개 추상적이다. 그렇기에 그 추상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통찰해, 어떤 의미 있는 일반적 사실을 획득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시간을 더 내서 철학적 경구를 몇 찾아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떤 주장은 그와 정반대 되는 의미의 주장과 짝지어진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는 말은 '인간은 이타적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을 포함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특별한 경험'을 함으로써, 그 경험으로부터 얻은 감상을 평생의 인생 모토로 삼으며 살아간다. 그때 느꼈던 강렬한 정서가, 그 경험이 '객관적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느낌을 제공해줬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자면 개별 사례로부터 추상성을 추출해낸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이용된 사례는 단 하나다. 이는 그런 깨달음이 대체로 착각이거나 독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추상성을 다루는 작업은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긴 하지만, 유익하기도 하다. 당신은 추상적인 무언가를 보며 그 안에 담긴 함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볼 수 있다. 이는 사고력을 높이고, 일상 속 사건이나 뉴스 보도 안의 사실로부터 숨겨진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통찰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또한 시간 절약의 장점도 있다. 당신은 어떤 일반화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개별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없다. 단지 하나의 추상적인 명제를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그 추상성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추상적인 것들이 '어렵고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도, 구체적인 지식이 없으면 해당 분야에서 활약하기 힘들다. 추상성은 구체적인 것들을 이어 붙여 형성되는 것이지,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혹은 그것을 용이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와 관련된 무수한 개별 사례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제공하는 쪽에선 앞서 말했듯, 추상적인 내용과 관련된 구체적인 예시를 덧붙이면 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오독의 위험이 있다. '예시'라는 것은 보통 당신이 원하는 추상성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추상성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인 예시로부터 화자가 의도치 않은 다른 무언가를, 추상성의 속뜻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다른 하나는 그 추상적인 내용의 논리적인 조직력을 높이는 것이다. 예컨대 '추상적인 글'을 생각해본다면, 쓰는 입장에선 그 글의 논리적 구조를 명확하게 하면 된다. 반대로 그것을 읽는 입장에선 글의 논리적인 구조를 추출해서 읽으면 된다. 이는 다소 '지저분한 글'을 읽을 때도 유용한 방법이다. 문단 사이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동어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지시하는 주제가 모호한 글을 읽을 때, 그 글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문장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용을 구조화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장과 근거'로 정리하는 방법이 있다.
쓰는 이는 이러한 구조화를 순서대로 풀어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혼자 깊이 사고하고 고민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일수록, 어떤 사건이나 이슈에 대한 숨은 의미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피상적인 정보 수준에서 드잡이질이나 하는 사회일수록 추상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손에 꽉 잡히는, 아주 구체적이면서 한 두 개의 사안을 토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인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추상성은 무책임함과 허세를 표현하는 데 동원되는 경향이 더 짙은 것 같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배설해놓은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추상성이 무언가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기준의 일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추상적이라는 뜻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