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수동적 공격성
요즘 들어 자신의 생각에 대한 타인의 의견에 대해, 지나치게 방어적인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어쩌면 전에도 많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혹은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에 대한 대응이 핀잔이나 냉소인 경우의 빈도가 늘어난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반응 성향을 '수동적 공격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실제로 있는 용어인데, 여기선 좀 더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수동적 공격성'이 짙은 사람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지만, 어떤 상호작용이 발생하여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 제시될 시,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비꼬는 대답을 하거나, 고의적으로 대충 듣는 모양새를 취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반응 성향은 오늘날 종종 이슈가 되는 반지성적 사례들을 포함한다. 구체적으론 생소한 한자어에 대한 반감, 과학적 이슈에 대한 양비론, 정치적 무지를 포장하는 치장적 냉소 등이 일종의 '수동적 공격성'에 해당한다. 이들은 자기 세계에서, 자기 생각에 갇혀 지낼 때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그 안의 요인들을 건드리면, 그것의 정당성이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냥 화를 낸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 깔려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다양한 요인이 존재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폐단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럼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을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 범주 안에는 시간, 사랑, 생각 등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추상적인 것들까지도 포함된다. 이러한 사고방식 아래에선 시간은 돈으로 환산될 때만 가치를 가지고, 기념일에 주고받는 선물의 가격표가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그리고 의견은 소유물이 된다.
의견이 소유물이 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오늘날 사람들이 물질적 요인에 가치를 귀속시키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파트 평수, 자동차의 종류, 의류의 출처나 기타 전자기기 따위의 것들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타인의 정체성을 가늠할 때도 그러한 외적인 요인에 치중하여 판단한다. 연봉이 얼만지,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 몰고 다니는 차종은 무엇인지 등을 알면 마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 사람에 대한 욕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에 대한 조롱으로 귀결된다. 누군가 당신이 가진 학위 졸업장, 당신의 통장에 찍혀 있는 액수, 당신이 신고 있는 신발의 가격 같은 것들을 비웃으면, 당신은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자기가 가진 소유물이 자신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정체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 소유물에 대한 비난은 그것을 소유한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비난이 된다.
여기서 의견이 소유물로 변했다는 말의 의미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하나의 소유물로 여긴다. 즉, 그것을 얻거나 잃는 것이 재산상의 이익이나 손실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견을 공격받는다고 느끼면 일단 화를 낸다. 마치 상대방에 내 재산을 빼앗아가려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마치 그 의견을 소유하고 있는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것 같으니까. 이러한 강박 속에선 건전한 피드백이나 토론 같은 게 존재할 수 없다. 이들에겐 모든 대화가 경쟁이고 다툼에 불과하다. 여기서 승리란 내 재산, 즉 내 생각을 지키는 것이다.
의견의 물질화는 둘째 치고, 나의 의견에 대한 비판을 나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내 의견은 내가 주장한 것이니까, 그 의견에 대한 비판은 나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게 아닌가? 이런 착각이 '수동적 공격성'을 야기한다. 당신의 의견은 당신이 아니다. 예컨대, 당신이 칸트를 옹호하여 어떠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칸트적 이론을 동원해 논변을 구성한다고 해서, 칸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견은 그냥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다.
'의견'과 '나'를 분리하는 것은 삶에 많은 도움을 준다. 당신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의견에 대한 비판이지, 나에 대한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바꾸는 건 어렵지만, 의견을 바꾸는 건 쉽다. 나를 교정해야 한다는 건 불쾌한 일일지 모르지만, 의견을 조율하는 건 생산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실패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두려움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시도'를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시도의 실패는 나의 실패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패는 그 시도의 실패일 뿐이다. 다른 시도를 도모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의견의 물질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뭐가 문제인가? 오늘날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경제체제 아닌가? 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 마음, 가치관도 '자본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선 내가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인 것'에 대한 비판은 이미 너무 많아서, 그것들 중 몇 개를 골라 되풀이하는 건 어쨌든 뻔한 소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 정도만 지적하고자 한다.
'수동적 공격성'은 삶을 전쟁터로 만드는 방식이다. 모든 상호작용을 뺏고 빼앗는 전투로 만들고, 이기고 지는 싸움으로 전환한다. 이는 피곤한 일이다. 이런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피곤한 일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 피곤해할 일로 포화된 사회다. 그러니 내가 몰랐던 무언가를 누가 알려주면,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넘어가자. 누군가 내 의견이나 행동 성향에 피드백을 주면, 나에게 관심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냉소는 멋있는 패션 같은 게 아니다.
* 덧붙이자면, 어떤 생각은 실제로 물질적 재산처럼 보호받아야 하기도 한다. 창작물이나 기술에 대한 권리 등과 같은 저작권에 관한 문제가 이에 해당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같은 범주의 이야기는 상술한 내용과는 결이 달라 따로 논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