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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05. 2024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만능열쇠

#48. 효과

  어떤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노력이나 시간, 에너지 같은 것을 비용이라고 해보자. 여기서 효과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위한 과정의 일환일 수 있고, 일정한 사태나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작용 등일 수 있다. 논의의 선명함을 위해서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작용' 정도로 생각해 보자. 이에 효과가 의도하는 목적의 규모가 크고 복잡할수록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예컨대 '신체적 건강'이라는 목표를 생각해 보자. 이를 위한 비용은 시간과 일정한 장소, 효율적인 운동법에 관한 지식과 근력의 소진 등 여러 자잘한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비용의 투입은 근력의 상승 및 근육량의 증가, 심폐지구력 강화 등의 효과를 산출한다. 이 효과의 장기적인 지속은 신체적 건강이라는 목표를 달성한다.


  이와 대조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좋은 사회 만들기'라는 목표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목표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일단 좋은 사회라는 표어가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특히나 이러한 목표가 단순히 나 자신에 대한 것만이 아닌, 나와 생각도 성장 배경도 다른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어쨌든 여러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 이 목표를 위해선 우선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논리나 제도적 기초에 기반해 있는지, 그 사회의 양상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고, 또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작금의 사회를 구성하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지반 같은 것들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등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 이론 내지 정치 철학의 수많은 저서들과 논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부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회 만들기'는 무엇보다 실천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끈질기고 치열하게 공부한 내용들을 가지고 실제 사회에서 조직을 설립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며,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비용'의 목록은 또한 수많은 세분화를 통해 무수한 명세표 목록을 만들어 낸다.


  이상의 예시들은 상기한 귀결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기 위한 단적인 사례들일뿐이다. 더 거대한 목표는 더욱 강력한 효과를 요구하며, 이는 더 많은 비용의 투입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인간이 투입할 수 있는 비용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쓸 수 있는 시간,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수면과 식욕 등 기본 욕구의 제약,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물리적 한계와 내가 접근 가능한 정보 수준의 한계가 언제나 존재한다. 자신이 사용 가능한 비용의 범주를 명확히 파악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달성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려, 결국 별다른 의미도 없는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비용을 낭비하는 사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실패들이 쌓이면, 달리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보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 자체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아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상기한 것들은 어떤 입장이나 이론에 따라 찬반이 갈리는 내용은 아닌 듯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는 단순한 사실을 풀어쓴 것뿐이다. 내가 좀 더 강조하고 싶은 바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비교적 엄청나게 적은 비용으로, 그에 비해 압도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룬다면, 사람들은 어떤 거시적인 목표에든 도달할 수 있다. 그 선택지란 바로 일종의 불매 운동이다.


  무슨 불매 운동 따위를 그렇게 과장해서 말하냐고 할 수도 있다. 우선 불매 운동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어떤 사회적 목표를 위해 특정 기업 등의 집단에서 나오는 재화 및 서비스를 의도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집단적 활동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불매 운동이라면 과거에 일본 상품에 관한 불매 운동을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불매 운동은 한 사회의 개개인이 최소한의 노력만을 투입하면서, 그 개개인들이 연대하여 추구하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과를 산출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몇 가지 단순한 예를 생각해 보자. 어떤 악덕 기업이 있다. 그 기업은 사내 노동자에게 가혹 행위를 남발하고, 불법 탈세에 열을 올리며, 기업의 오너는 매일 같이 타인을 비방하고 사치를 과시한다. 즉, 이 기업은 도덕성의 측면에서 최악이다. 사람들은 내심 이런 기업은 잘 돼선 안 되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업의 재정적 규모는 거대하고, 법의 심판을 기대하기엔 여러 장애물에 부닥치게 된다. 이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단순히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 중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악덕 기업이 그간의 업보에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 바로 불매 운동이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선 시장의 경쟁이 심화되어 있기에, 대체제를 찾기도 쉽다. 분명한 인식과 제품 정보만 가진 채 그냥 그 기업의 것들을 소비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렇게나 적은 비용이 결집하고 누적되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산출한다. 그 기업은, 어떤 대체 수단이나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기업의 도덕성을 책망하기 위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 불매 운동이 산출할 수 있는 효과는 무궁무진하다. 또 다른 예로 기후 변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갑자기 기후 변화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명확한 문제의식을 갖추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이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선택지가 바로 불매 운동이다. 대량의 쓰레기, 대기 및 수질의 오염 등 환경 파괴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업이다. 많은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오염 물질을 많이 배출하는 방식의 저렴한 생산 공정을 구축하고, 일회용품을 남용하며, 엄청난 규모의 쓰레기를 여기저기 매립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이제부터 환경오염을 막기 위한 규제를 무시하거나, 기후 변화를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경제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기업들을 불매 운동으로 응징하기로 한다면, 당연히 기업들은 환경 문제에 발 벗고 나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분야에서 대체제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소비자의 응징에 의해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 시장에서의 그 격차는 곧장 현저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불매 운동이 분명한 체계성과 지속성을 보장할 수만 있다면, 기업이 이에 네거티브하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또한 핵심이다. 기업은 '그래, 안 살 거면 사지 마'의 스탠스를 유지할 수 없다. 몇몇 바보들이나 그렇게 자존심만 내세우며 자기네 시장 가치를 떨어트리는데 주력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업들은 '사회적, 도덕적 비용을 투입하는 게 결과적으로 이익'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위선이든 뭐든, 어쨌든 사태는 좀 더 나아지는 것이다. 좋은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좋은 의도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방법(적은 비용으로 비할 바 없는 효과를 산출한다는 점에서)이 거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반적 수단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는가?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 불매 운동 타깃을 오래 기억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상당한 비용 처리일 수 있다. 또한 표적이 된 기업들은 대체로 이른바 떨어져 나간 민심을 잡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용한다. 소비재에 더 많은 할인률을 부과한다던가, 품목의 바리에이션을 넓히고 상표명을 바꿔서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선 처음엔 불매 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시금 소비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매 운동에 동참하지 않으면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무신경한 사람' 정도나 되지만, 경제적 이유의 기회를 놓치면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멍청한 사람이 되는 것을 훨씬 두려워한다. 사회 전체에 지적 콤플렉스가 만연해 있는 까닭이다.


  불매 운동의 또 하나 적대적 요인은 표적이 된 기업과 이익 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 내지 집단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보호하기 위해 은근슬쩍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을 폄하하거나,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피장파장으로 악을 쓴다. 어쩌면 그들의 눈에는 정말로 표적 기업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사람의 가치 판단은 상황과 조건에 휘둘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회적 판단이라는 것은 형용 모순적인 표현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불매 운동을 위시한 사회적 결집이 거시적 변화를 위한 좋은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쟁점에 관한 여러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건전한 토론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 또한 부수적인 장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오래 결집하기 어려운 시대다. 과거 전체주의에 관한 두려움과 거부감, 이익 집단들의 파편화, 진영을 가리지 않는 정보전의 공세전이 이 같은 어려움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사회적 변화(그런 것이 필요하다면)를 위한 적절한 비용 지출의 수단들을 갖추고 있는가? 개인이 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의 용이함은 그 사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조건이다. 개인의 일상과 정부나 국회 같은 거시 구조와의 상호작용이 단절되어 있다면,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선거의 투표에 참여한다고 해도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매 운동은 비용의 측면에서든 효과의 측면에서든,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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