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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Feb 17. 2024

진리라는 렌즈가 현실을 찌그러트리는 방식

#49. 원칙, 현실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들, 앎에 대한 욕구 같은 것들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어떤 보편적인 것들이다. 이른바 진리나 지혜라고 일컫는 것들 말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학문은 바로 이런 일에 종사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저명한 학자들이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어긋나는 괴상한 주장을 일삼는 걸 목격한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의심하기 힘든 것임에도, 그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상한 괴리감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단 학자들에 관한 얘기는 아니지만, 하나의 설명은 이렇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사실의 탐구에 침잠하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아주 구체적이고 단편적인 사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호도한다. 예컨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서울 노원구의 어느 지하상가 화장실에서, 2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폭행했다는 기사에서 '젠더 이슈'를 본다. 혹은 '폭력은 나쁘다'는 일반적 사실에 심취하여 현실의 모든 세부사항을 무시한 채, 폭력의 가해자만을 비난한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이런 종류의 사건은 그렇게 일반화된 해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여러 세부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해당 사건은 여성이 먼저 남성을 때리거나 끔찍한 인격 모독을 남발했기 때문에, 남성이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상대 여성을 자신의 오랜 원수로 착각했기에 일어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해당 여성이 남성의 부모를 살해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남성이 여성 혐오의 관념에 찌들어서 야기된 폭력 사건일 수도 있다.


  내가 이런 극단적인 가정들을 제시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사건의 구체적인 요소와 그것을 포함하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사건들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고, 그 차이에 따른 세부적인 감수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사건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고,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쩌면 공용 화장실의 분리 및 공간 배정과 관련될 수도 있고, 천박한 음주 문화의 세태일 수도 있다. 혹은 도심지의 구획 단위로 나타나는 빈부 격차에 따른 치안 양극화 문제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사건을 바라보는 돋보기의 배율을 적절히 조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돋보기의 배율을 한없이 낮은 수준으로 설정한 채, 일반적인 사실 내지 규범만을 두고 자신의 신념을 전개한다. 그럴 때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단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의 일환일 뿐인 것이 된다. 예컨대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남녀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폭력이든, 성 관련 문제든, 경제적 문제든, 행정적 문제든 간에)은 '젠더 갈등 문제'가 되고, 필요에 의해 야기되었을지도 모를 모든 사건은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라는 식의 공허한 스탠스로 귀결된다. 마치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군인 철수가 눈앞에서 총을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기려는 적군을 해치운 것을 두고, '그래도 살인은 하면 안 되지'라는 식으로 철수를 비판하는 느낌이다.


  아마도 또 하나의 단편적인 예시는 이번에 기사화된 축구 선수들과 관련된 얘기일 것이다. 사건의 개요는 라커룸에서 특정 선수들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 일반화된 수준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래도 폭력적인 언사는 안 되지', '그래도 나이가 어린 선수가 그러면 안 되지'라는 식의 단순한 결론에 매몰될 뿐이다.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어떤 수준에서의 논쟁이 있었고 당사자들은 해당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믿는 일반적인 사실들, 스스로 믿는 바 '진리'에 매몰되어 색안경을 끼고 한 두 마디 중얼거릴 뿐이다.


  이런 태도의 문제는 생산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구체적인 사건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사실에 따라 분류하는 사람들에게, 사태에 관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그 모든 세부 사항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 끝엔 '그래선 안 되는 사실'만이 남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저런 해석의 가능성과 구체화되어야 할 미정의 요소들을 뒤로하고 '그래서 폭력을 한 사실이 사라지냐', '그래서 폭력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는 거냐'라는 식의 태도를 고집한다. 성폭행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자살하게 된 자녀의 부모가, 해당 사건의 가해자가 법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출소했을 때 그를 죽인 사건을 두고 그저 '그래도 살인은 하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이들과 발전을 도모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에 침잠한 이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진보 또한 불가능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왜 생겨나는 걸까? 내가 보기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순수성, 완전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며(이때 항상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노력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흑백 논리의 함정에 걸려들기 쉽다.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며, 항구적으로 결정된 내용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려 한다. 그 주제에 대해 더 생각하거나 공부할 필요가 없이 말이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느 정도 현실성을 결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여의 원인은 현실에서의 구체적 경험을 다소 결여한 탓일 수 있고(인터넷상에서나 책으로만 현실을 파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그것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거부한 탓일 수도 있다. 전자의 맥락에서 오늘날의 사이버 현실이 보편화되고 추상화될수록 이런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원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이드라인이다.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그 혼란과 관련된 일반적인 길라잡이로 원칙을 찾게 된다. 원칙은 '대체로' 옳기 때문에, 즉 그 상황에서 보통 효과적이기 때문에 원칙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원칙은 가능한 많은 상황을 포함해야 하고, 따라서 보편·추상화되어 있는 탓에 그와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사태들에 무력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사태에 관해 원칙은 위험하고 무익한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 따라서 원칙은 언제나 참고의 수준에 머물러야 하며, 각종 원칙들에 포함되어 있는 내적 속성들, 지침의 방향성 같은 것들을 익히고 나면, 당신은 무엇보다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들에 직면해야 한다. 당신은 원칙을 배경 지식으로 둔 채, 그러나 세부 사항들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원칙에 반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종 원칙은 너무 오래되거나 불분명하여, 진실을 호도하거나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열망이 강할수록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무지의 소치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현실에 온전히 발을 딛고 살아가기 위해 진리를 바라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태도는 현실을 분명하게 마주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 현실의 세부사항을 생략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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