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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Sep 10. 2024

일상 속의 타인을 이해하기

#52. 인지적 도구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의 거대한 복잡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복잡성 내 각각의 요소에 조야한 이름을 붙이며, 마치 인간의 내적 양상을 분할 가능한 단위들로 쪼개어 전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하지만, 그건 편의상의 구분일 뿐,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없다. 이에 누군가는 그것이 하나의 설명 체계를, 즉 하나의 집합만을 가정하기에 발생하는 설명적 결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을, 세계를 하나의 집합과 그 안의 원소들만으로 묶어서 표현하려면 언제나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예외'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무수히 많은 집합으로 표상되는 여러 설명 체계들을 끝없이 포개다 보면, 그들 사이의 교접으로 인해 결국 실재에 관한 빈틈없는 전체 설명을 가지게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설명이, 그것의 대상이 되는 실재와 그것에 관한 모든 설명 체계가 동일한 차원(예컨대, 평면상)에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설명은 단일한 층위를 고집하고, 어떤 설명은 입체적인 논의를 허용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동일한 실재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여러 메타-학문들을 생각해 보라.)


  다만 어쨌든 이러한 난점은 인식과 실재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는 것만이 우리 사유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입장에서나 주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유는 그러한 목적만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 것 같진 않다. 우리는 소박한 일상적 차원에서, 사유의 객관적인 본성이나 그것의 한계를 추상적으로 조망하기보단, 기능적 이점 같은 것들을 취할 수도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인간이 어떻다던가, 세계가 어떻다던가 하는 설명은 하나 같이 상기한 '궁극적 목적'에 종사하지 못하는 방식의 접근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모종의 편익을 주며, 어떤 통찰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가 시계라는 장치의 본질적 속성이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의 기능적 이점(규약된 현재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을 누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인지한다고 해서, 물리적 의미의 시간 개념이나, 극히 정교한 기계 장치로서의 '시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을 아는 것은 여전히 유용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불완전한 통찰, 편의상의 구분을 내포하는 분석은 그 자체로 인간 존재의 본성을 밝힐 순 없을지라도, 그러한 단적인 인식이 우리의 일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당신이 인사 담당자로서 직원을 뽑아야 할 때, 소개팅이나 선을 보는 자리에서 이성을 판단할 때, 친구의 행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사회적 이슈를 바라볼 때 이러한 접근은 기능상 이점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사안에 대한 판단의 시간적 효율을 배가시키거나(판단의 정확성은 경감하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 통찰력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객관적 인식이라거나,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이라고 여기는 실수를 범하진 말아야 한다. 그것은 순전히 기능적 이점을 제공할 뿐이고, 그러한 유익에 상반되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앞선 문단들에서 말한 바를 참조하라.)


  



  작금의 많은 학문이 이러한 기능적 이점을 제공하는(이른바, "실용적인") 설명을 생산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자기들만의 전제와 용어들로 치장한 '세련된' 설명 체계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각 학문 분야의 개론서들을 들추는 걸로 족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바는 그런 종류의 설명은 아니다. 단지 일상적인 맥락에서 타인을 볼 때, 온전한 판단을 위한 하나의 설명틀(물론, 다소 나이브한)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타인을 볼 때 세 가지 요인에서 그를 볼 수 있다. 여기선 그것을 편의상 , 행동, 태도로 구분해 보자. 말은 문자 그대로 타인이 발화하는 언어적 내용에 관한 것이다. 행동은 그 사람이 실제 자신의 몸으로 물리적 세계에서 실천하는 신체적 양상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도는 말과 행동을 매개한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경향성을 뜻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철수는 어느 날 "나는 수영을 잘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곤 휴대폰을 꺼내 '수영을 잘하는 법', '수영을 잘 가르치는 학원', '좋은 수영 용품들' 따위를 검색한다. 그래서 학원에도 등록하고, 나무위키에서 수영에 관한 항목도 정독하고, 물건들을 실제로 사기도 했다. 이후 그는 수영장에 매일 같이 드나들며 하루에 최소 두 시간은 꾸준히 수영 연습에 몰두했다.


  여기서 우리는 철수를 앞선 세 가지 요인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말의 관점에서, 철수는 "나는 수영을 잘하고 싶다."는 문장을 발화했다. 태도의 관점에서, 철수는 그 말의 의미론적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론을 탐색하거나, 실질적인 준비를 도모했다. 행동의 관점에서, 철수는 실제로 수영을 잘하기 위해 매일 같이 연습했다. 즉, 그는 정말로 수영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뚜렷한 사태인 말과 행동, 그리고 그보다 다양한 접근 가능성을 내포한 태도의 조화를 확인할 수 있다. 철수는 자신의 생각, 의도, 바람 같은 것을 말로 표현했고, 그 발화에 담긴 의미론적 내용을 행동으로 실천했으며, 그 실천의 용이함을 위한 어떤 자세를 가졌다. 이러한 조화가 반복되어 관찰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한 조화가 자주 실천되는 영역, 상황 같은 것들이 그 사람의 내면을 구성하는 주요인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구분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 즉 사유의 기능상 이점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경우는 세 요인이 부조화의 상태에 놓이는 경우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포부나 감상을 발화하면서도, 그 말의 의미론적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말과 태도의 측면에선 적극적이면서도, 정작 행동의 실천으로 옮기진 않는다. 말이나 태도의 예비 없이 묵묵히 앞장서 행동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조화의 양상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의 단서들을 얻게 된다. 심지어 이러한 단서들은 꼭 유형의 구분 정도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철수가 이번엔 "나는 산책을 사랑한다."는 문장을 발화했다고 해보자. 철수의 이런 말이 태도, 행동과 조화를 이루려면, 산책할 기회가 있다면 그는 그 기회를 반겨야 하며(태도), 또 실제로 산책이라는 행위를 실천(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가 산책의 기회가 주어짐에도 그 시간을 다른 행위로 전용하거나('사랑하는' 것 같진 않은 행위 등으로), 오랜 기간 동안 한 번의 산책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발화한 문장을 통상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그는 인상관리 차원에서 그러한 말을 꺼낸 것일 수도 있고(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단순히 오래전에 산책했던 경험의 감상을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보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어른이 돼서 읽으면 재미없을 책을 어른이 돼서 읽어보지도 않은 채 "그 책은 재밌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외에도 말과 행동, 태도의 불일치는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행동'을 보이는 연인,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그 바람에 유익한 어떤 강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친구의 '태도' 등, 우리는 그러한 부조화에서 어떤 종류의 실재를 직관할 수 있다. 기만과 위선, 허위로 치장된 껍데기 속의 진의 같은 것을 말이다. 우울감에 젖어 있는 누군가의 말은 그 우울감에서 극복하고 싶다는 의사의 표명일까, 아니면 비탄에 젖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나르시스적 감상일 뿐일까? 이를 특정하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한 그의 태도와 행동을 보라.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일삼는 누군가의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이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의 평소 말과 태도를 면밀히 관찰하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이 세 요인 중 하나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가능한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 태도를 인지하고 그들 사이의 조화, 부조화를 판단하는 것이 좋다. 나아가 그러한 판단의 적합한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고 적용시킬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적용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을 만한 지점은, 어떤 사람의 진의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을 비교적 잘 반영하는 우선순위가 세 요인 사이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행동을 가장 우선으로 보고, 그다음에 태도, 그리고 말을 본다. 인간의 말은 너무 가벼워, 많은 경우에 행동을 따르지 않고 저 멀리 앞서 나가곤 한다. 거듭 강조하듯 하나의 요인만 가지고 섣부른 판단을 해선 안 되지만, 그래도 어느 하나에 비중을 둬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행동을 봐야 할 것이다. 행동은 행위자를 속이기 어렵다. 적어도 말보단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신중함은 그 특성상 오랜 시간의 관찰과 인내를 요구한다. 말과 태도, 행동의 시간적 구현은 그 시기를 각각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내일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세 달 뒤엔 정확히 그대로 실천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부조화로써의 단서를 발견해야 할까, 아니면 조화로 나타난 실재를 포착해야 할까? 그 사이에 다른 말이나 행동, 태도에서 변화가 수반된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외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인가?


  불행히도 오늘날 신중함은 그다지 미덕이 아닌 것 같다. 정해진 유형에 따른 빠른 판단이 오히려 농담 소재로 소비되고, 그러한 규격에 따라서만 타인을 구분하는 게 보편화되고 있는 까닭에서다. 그러나 올바른 인식을 위해선 도구의 기능상 이점을 이용하는 것과, 도구에 맞춰 실재를 왜곡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후자에 매몰된 사람들은 현실의 의미 있는 사실들을 무시한 채, 기성의 담론에만 천착하며 그에 맞게 현실을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균열을 낳기 마련이며, 많은 갈등을 생산함과 동시에 다른 차원의 생산성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원동력의 주체가 또 다른 담론적 규약에 매몰되게 된다면, 사태는 반복될 뿐이다. 기나긴 인간사의 거시적 차원에서도 이런 문제가 반복될지언데, 한 개인의 삶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허위와 왜곡에서 허우적대고 있기엔, 적어도 인류사에 비해선,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짧다. 때론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판단에 있어선 대부분 그렇다.

  요컨대, 우리는 타인을 판단할 때 더욱 신중해야 하며, 또 자신이 어떤 관점을 빌려 그를 판단하고 있는지, 그 관점이 어떤 이점을 가지는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은 기능상의 이점을 제공할 뿐, 실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도구는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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