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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06. 2025

일상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에 대한 고찰

#54. 당황


  모든 식자는 일상 속에서의 당혹스러움에 대해 익숙해져야 한다. 아마 학문적으로 정향된 사람일수록, 이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먼저 밝혀두자면, 나는 보통 학자들에 대해 투사하는 통상적인 관념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예컨대 학자들은 평생 공부만 하느라 세상물정에 어둡다던가, 순수하고 이상적인 경향이 강하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보기에 대개 학자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영역이나 삶의 사소한 부분들에 관해, 사적인 생활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과 유사한 생각과 상식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몇몇 극단적인 학자들은 자신의 사적인 경험에 매몰되어 편견과 아집만으로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러한 '극단의 사례'는 학문 영역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위 금수저라고 불리는 태생적 부자들, 운이 좋아 성공한 이른바 '자수성가'의 수혜자들, 기타 인종이나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에 휩싸인 사람들 역시 이러한 '극단의 사례'에 포함되며, 따라서 사회의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고로, 학자들이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어떤 미성숙함, 사회적 어리숙함 같은 게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들은 통상적인 사람이 모르는 것만큼 모를 따름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학문적 갈래에 관해, 마치 그 분야에 아무 관심도 없는 '일반인처럼' 놀랍도록 무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학자와 같은 식자들이 주의하면 좋을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지식이나 경험의 한계가 아니라, 어떠한 태도와 '괴리감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에서 촉발된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면, 도덕적으로 고취된 철학자는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는 '친근한 무례함'에 당황하기 쉽다. 그 상황과 행동만 따로 떼어내어 고찰하면 무례하다 쉽게 평가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할 만한 것들이 우리의 일상적 맥락과 결합되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책이나 논문의 이론들을 고찰한다고 해서 체화되는 게 아니다. 설령 머리로 상상 가능한 것들이라도, 굉장히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하면 당혹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뒷담화를 일삼는 사람을 보기도 하며, 유머를 치장한 비꼼의 사례 등을 접하게 될 것이다. 통상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는 것들,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상정하면 "왜 그렇게 유난이야?" 같은 핀잔을 들을 법한 사태들 사이에서 그는 당혹스러워진다.


  다른 예로 우리는 손쉽게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어떤 것이 옳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서 말해지는 것들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나 행동, 태도를 일삼는 그들을 우리는 또한 보게 된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보통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 의식되지 않는다. 언뜻 보면 '일부로 저러는 건가?' 싶을 상황에서도, 종종 그들은 그것이 '정말로 자기모순적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마치 최면에 걸려 특정한 말이나 행동을 공허하게 반복하도록 조작된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게 아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느껴질 수 있는 당혹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언급한 것이다. 다만 과장은 아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을 스스로 일관되게 실천할 능력은 상실한 상태이다.


  특히나 중요한 사례는, 식자들이 공부하고 스스로 동의한 내용들과 괴리된 행태를 식자 자신이 사적인 생활 영역에서 반복하고 있는 걸 발견하는 사태일 것이다. 이는 분명하게 가능하고, 장담컨대 비일비재한 일이다. 마치 회사에 출근했을 때의 내 마음가짐,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의 내 마음가짐, 친구랑 놀러 갔을 때의 내 마음가짐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사소하게나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의식적으로 공부한 내용과 사적인 생활 영역(주로 욕망에 충실해 무의식적으로 구는)에서 행하는 것들은 서로 분리되어 한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 식견이 풍부한 많은 이들이 부부싸움과 자녀 양육 실패의 문제를 겪는 걸 생각해 보라. 그들은 하나 같이 '내 가족은 다르더라.'는 말을 강박적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상황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공부한 이론적 배경들, 추상적으로 해결하는 학문적 문제들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 역시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기껏해야' 인간이고, 포유류이고, 신경생리적 뇌를 가지고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단지 그러한 식자들의 태도와 인지적 적용일뿐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자기 인식 경험은, 어떤 의미에선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처음 시작하기에 어려운 경험'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한 번 그러한 경험을 극적으로 겪고 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일상과 생각, 행태를 점검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서게 된다. 그 출발선에서 자신의 지식과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가장 사적인 영역과 결부시키고 조화를 이룰 때,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 한 번의 경험, 그 출발선에서의 전격적인 재점검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괴이한 부조리와 혼란스러움에 침잠하게 된다. 그래서 세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기행이나 언행들을 일삼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괴팍해진다. 몇몇 나이 든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 정치인, 기업인 등등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멍청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 '괴팍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식과 사적인 태도 사이의 간극은, 단순히 분리된 상태에서 유지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정신의 요소들은 은연중에 서로를 침습하며, 무의식상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마치 당장 떠오르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어렴풋이 생각나는 이미지나 단어처럼 말이다. 그것이 신념이나 거대 담론처럼 규모가 큰 관념 체계일 경우, 일상적이고 사소한 사적인 생각이나 직관들을 뒤틀기가 더 쉽다. 예컨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밥을 먹거나 길을 걷다가 보고 들리는 것들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와의 가벼운 대화 속에서도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한쪽으로의 동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과 사생활의 드넓은 간극을 좁히기는커녕 그 공백을 기형적으로 찌그러트린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을 펼쳐서 정리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문제는 점점 악화된다. 의식적 정돈의 과정, 즉 반성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적 침식의 일종이다.




  그렇기에 당혹스러움은 중요하다. 아는 것과 실천, 일어난 일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 의아함은 각성의 계기를 촉발한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그런 일이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낯섦에 친숙해지라는 말도 아니고, 차이에 점차 무뎌지라는 말도 아니다. 더 날카로운 정신성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자주 당혹스러운 일들을 겪게 될 것이며, 또 많은 것들이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당혹스러움을 그저 멀리 두려고만 해선 안 된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 당황은 일종의 경고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에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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