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정신, 사상
정신은 사상(ideology)보다 크다.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그렇다.
먼저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 보자. 여기서 넓은 의미란 어떤 개별 대상 하나만을 집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포괄하는 범주로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즉, 정신이 사상보다 크다고 할 때, 한국인 철수의 정신은 민주주의라는 사상보다 크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정신'이라는 범주가 인간사에 존재하는 '사상'의 집합보다 크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사상은 인간의 발명품과 같다. 자연 세계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리 법칙 또한 받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이 일정한 체계를 갖춰서, 그 인간들의 행동이나 공동체의 질서를 제약하고 인도하는 무언가다. 따라서 그것은 말로 언급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학습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동시대의 다른 사람에게, 또 후대의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존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상의 근본적인 전제다. 사상은 저마다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써 방향성과 지켜야 할 제약을 제시한다. 사상의 실천 구조는 그 제약(수단)을 준수하면, 그 사상이 목표하는 궁극적인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조건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실제 실천 과정에선 그 아래 수많은 세부사항과 그 사상이 본래 의도하지 않았던 변주들이 나타날 수 있지만, 수단과 목표라는 큰 틀은 변하지 않는다. 목표가 없으면 사상을 가질 이유가 없고, 사상이 의도한 목표에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면 그 수단을 지킬 필요가 없다.
따라서 사상은 생각의 하위 집합이다. 정신이라는 범주가 생각의 전체 집합을 의미한다면, 그렇기에 사상은 정신에 예속된다. 물론 우리는 어떤 고도의 정신성을 발견할 수 없는 유아 시절의 아이나 성장기의 아이들에게서, 외부에서 주입된 사상이 그들의 모든 기호나 행동 양식 같은 것들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또 충분히 성숙한 어른의 경우에 부분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역지배는 문제이긴 해도 대개 과장된다. 인간은 하나의 프레임만 가지고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하나의 영역에서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특정 사상에 경도된 소규모 공동체에서 태어난 아이조차, 우정이나 사랑의 프레임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자연 세계에 대한 인상을 가지게 되고, 크고 작은 호기심에 도취된다. 그 모든 물음표에 대해 답을 내리는 사상은 있을 수 없다. 말했듯이, 사상은 한정된 목표를 위한 수단의 제시를 그 궁극적인 구조로 가지기 때문이다. 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궁극적인 목표 같은 것은 없다.
이제 좁은 의미에서 생각해 보자. 여기서 좁은 의미란 어떤 개별 대상과 특정 사상 간의 일대일 대응 관계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뜻한다. 즉, 철수 개인의 정신이 특정 사상, 예컨대 민주주의라는 사상의 이념적 내용 전체보다 크냐는 것이다. 아마도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좁은 의미의 해석에서 당사자가 되는 '개인'의 정신적 스펙트럼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정신증을 앓고 있는 환자나, 표준적인 정신성을 결여한 이들처럼 스펙트럼의 극단에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면 뭐라 말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순진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의 개인은 언어적 학습이 가능한 일반적인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하자.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개인의 정신은 사상보다 넓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개인은 어떤 개별 사상의 모든 세부사항들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실현 가능성'과 '실현됨'의 엄밀한 차이를 지적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타당한 지적이다. 어떤 것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일어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어긋난 해석을 뉴스나 저널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내가 이 글에서 논하고 싶은 것은 이 우주의 구체적인 물리적 사태에 대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개념과 추론이 토대가 되는 의미론적 비교에 관한 것이다. '오늘 비가 내릴 확률이 90%가 넘는다'는 일기예보가 주어졌다고 해서, 오늘 반드시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높은 가능성조차도 그것의 실현과 괴리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비가 내릴 확률이 90%가 넘는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우산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타당한 의미론적 귀결이다. (설령 이때 어떤 사람은 우산을 챙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
어쨌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정신은 언제나 사상보다 넓다. 실제로 우리는 여러 사상적 내용을 하나의 뇌 속에 담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 사이의 의미론적 차이를 포착하고, 현실에서 마주하는 여러 상황들에 적합한 것을 선택하여 적용한다.
나는 이것들(적어도 이런 주장의 요지들)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상에 경도된 나머지,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신의 모든 요인을 사상에 귀속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의지적으로' 노력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돌출되는 상식적인 생각이나 느낌, 우리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 같은 것들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제약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정신을 사상의 하수인으로 두고, 그 사상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적이나 괴물로 여긴다. 하나의 사상에 그토록 예속되어 있는 인간이 그 바깥의 인간을 적이나 괴물로 여기는 '느낌'은 실재적인 것이다. 똑같은 한국어를 쓰면서도 그 한국어에 담는 의미의 전제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면, 그들은 소통할 수 없다. 사상의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있는 것은 종종 그런 차이를 만들어낸다.
더 넓은 것을 그보다 더 좁은 것 안에 욱여넣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 좁은 것은 넓은 것의 구조를 망가트리며, 금이 가게 하고, 때때로 박살내기도 한다. 물론 정신이라던가 사상이라던가 하는 말은 엄밀히 말해 어떤 구체적인 하나의 물리적 대상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념적 집합을 뜻하기에 이런 식의 비유가 완벽히 들어맞진 않지만, 그럼에도 사상이 강제하는 정신은 이런 식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 사상의 목록은 끝도 없이 길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 글의 문제적인 '사상'에 특정한 사이비 종교나 정치적 극단주의자들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형태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나 공동체주의, 기타 무슨무슨주의들은 전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사상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사람은 모두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인식은 그가 포착할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좁은 것만을 보게 되고, 그 좁은 영역에 해당되지 않는 요인들은 '없는 것'이 된다. 그들의 정신에서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실제로'라는 말이 혼란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들 정신에서 일어나는 있는 그대로의 일을 표현한 것이다. 이 물리적 세계의 실재가 부재하게 됨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다못해 가족애도 그렇다.
우리는 사상으로부터 정신을 구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가능하다. 아마도 이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실현 가능성'과 '실현됨'을 구분해야 한다. 어떤 사례들은 극단적으로 경도된 사상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거나, 그의 믿음 체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례들은 곧잘 '화제'가 되고, 그만큼 '특별한 일'로 취급된다. 즉, 사상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런 사상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