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을 끼고 행동하지 마세요

#56. 소음의 시대

by 사각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서도 소음을 발생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특히 조용히 행동하길 요구되는 장소에서 더더욱 두드러진다. 도서관, 강의실, 기타 공공장소 등에서 이들은 남들이 곧장 얼굴을 찌푸릴만한 소음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 낸다. 이들은 왜 그럴까? 이런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대체로 그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이어폰 따위의 것들로 자신의 귀를 막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이 발생시키는 소음을 듣지 못하거나 그것의 데시벨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자기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발생시키는 소리의 크기에 둔감하게 되고, 이는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소음 운반자들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소인배가 아니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귀를 막고 있을 뿐이다. 우스운 사실은 주변 소음을 피하기 위해 귀를 막은 그들이 많은 경우에 소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통계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비유이기도 하다. 이 비유의 교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기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가장 큰 소리를 내며 산다. 이는 두 가지 형태의 자기 인식과 연관된다. 하나는 나 자신에 관한 내적 성찰이다. 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나의 생각이나 행동이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것들인지 판단하는 역량과 관련된다. 다른 하나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특정하는 외적 성찰이다. 내 바깥에 있는 사회의 질서, 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어떤 생각의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지, 이것이 어떤 객관적 ·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관한 통찰력과 연관된다. 문제는 자신의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형태의 자기 인식 능력에 있어 떨어지거나, 혹은 떨어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 인식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사람이라는 것, 내 생각과 행동의 주체가 나라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엔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나와 같은 복잡한 사정과 사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회 구조에 관한 지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나'라는 주체를 망각하고 단순한 생각의 흐름이나 외부에서 주입된 기분에 휩쓸리는 것은 이런 식의 분별력을 갖는 데 방해가 된다. 내가 내적으로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또한 외적으론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좋은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합당한 지에 관한 올바른 성찰로 이어진다. 따라서 자기 인식은 사람다운 성찰의 기초적인 능력이자 조건이다.


그럼 자기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단서들을 가져야 한다. 그 단서들은 어떻게 수집되는가?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것, 내 말을 듣는 것, 내 행동을 스스로 관찰하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대처하는 방식을 자각하는 데서 그러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능하면 그런 단서들에 대한 평가를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논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성향 및 행동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평가하는데, 내 말을 듣고 내 행동을 관찰한 '너'는 이러한 평가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부차적인 방식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비유로 돌아가면, 내 귀를 막고 생활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고, 그런 것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관해 파악할 정보의 창구 하나를 배제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말이나 행동을 공연할 수 없는 것이고, 타인의 싸늘한 눈초리 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발생하는 소음은 듣지 못한 채,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비난을 보며 "왜 저 사람들은 저럴까?" 하는 식으로 뻔뻔한 고뇌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상기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접한 뒤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내가 놓친 나의 부정적인 면모를 검토하는 계기로 승화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방향이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지향해야 하는 삶의 기술이자 태도이다.


아마도 주지해야 할 점은 행적에 흔적을 남긴다고 해서 그것들이 언제나 민폐인 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소리가 소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비판해야 할 것을 비판하고 나서야 할 문제에 대해 용기를 갖고 행동하는 것은 민주사회 시민의 덕목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태도나 결의 자체를 비판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소음이라 여기지 않고 꼭 필요한 목소리를 높였다고 생각하더라도, 온전한 자기 인식과 객관적인 성찰의 과정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외침은 소음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 있다. 이 경우 그의 고함은 주체적인 행동의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세뇌나 음모론의 열렬한 하수인, 신봉자처럼 구는 꼭두각시의 외침일 뿐이다. 그것은 가치 있는 소리들을 뒤덮는 거대한 소음의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저기 그러한 소음으로 가득한 시대다. 자기 귀를 막으며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들은 일종의 라디오다. 자신이 옳다는 말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박의 여지가 있는 어떤 이견도 듣지 않는다. 그저 고고하게, 동일한 주파수에 맞추어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는 라디오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귀를 열고, 일상의 소소한 영역에서도 배려심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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