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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57. 의식적 노력

by 사각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은 우리의 본성일지 모른다. 지나가던 길에 시간이 궁금해, 모르는 사람에게 시간을 묻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이 당신에게 "오전 열 시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는 사소한 예시 같지만, 실제 일상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타인의 말을 얼마나 의식적으로 의심하는지 꼽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신뢰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따라서 이 자체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나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신뢰를 주고받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덕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러한 본성, 미덕에 관한 지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속여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 또한 언제나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득의 범위는 아주 넓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는 중차대한 거짓말도 있지만, 미묘하고 사소한 속임수를 통해 당신의 인상을 조작하려는 거짓말도 있다. 전자는 나중에 가서야 비교적 발견되기 쉬운 만큼 교정되기도 쉽지만, 후자는 내가 속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진실된 생각과 행동으로 여김으로써 그 거짓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게 된다. 무어라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딘가 찝찝하다'던가, '느낌이 안 좋다'는 이유로 A 대신 B를 선택하는 수많은 경우를 상상해 보라. 당신은 이러한 선택들을 사소한 일들로 여길 수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당신이 A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갖도록 체계적으로 속이려 한 결과일 수 있다. 당신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 이르러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속이는 기술은 점점 더 세련되어 가고, 속이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의 익명성을 등에 업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가 더욱 쉬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익'에 대한 현대인들의 기괴한 맹신, 이해득실에 관한 천박한 감각은 친구와 밥을 먹을 때, 같은 집단의 타인에 비해 평판의 우위를 점하려고 할 때 등 우리의 소중한 일상 속에서도 거짓말이 횡행하게 만든다. 심지어 거짓말쟁이들은 우리의 본성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용한다. 그렇기에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타고난 지능이 높은 사람도 얼마든지 거짓에 농락당할 수 있다.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고 조절하는 것, 생각의 습관을 스스로 조율하는 것은 그 자체로 특정한 훈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짓에 몰두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은,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만난 철수가 "고래는 어류야."라고 말했을 때, 많은 사람은 이 상황과 관련된 정보로써 '고래는 어류다.'라는 식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주제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고래는 어류래."와 같은 식으로 말하게 된다. 당신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의 운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과 소통의 과정은 재귀적으로 반복되며 그 믿음의 내용을 강화한다. 그러다 나중에 가선 그 정보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라고 굳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잘못된 믿음 강화'는 일상적인 정보의 여러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상기한 철수의 거짓 정보는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오인은 사회,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그릇된 선동의 결과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는 방법은 정보와 정보의 출처를 짝지어서 기억하는 것이다. 위의 예시로 치면 '고래는 어류다.'라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철수가 고래는 어류라고 말했다.'라고 기억하는 식이다. 철수의 발화가 나의 잘못된 신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무엇보다 내가 철수의 말을 그 자체만으로 기억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섣부르게 일반화된 내용으로 머릿속에 저장했기에 다른 사람과의 대화 과정에서 그 내용을 인출할 때도 '일반적인 사실의 형태'로 꺼내드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색인 작업은 일상적인 대화 외에도 정보를 습득하는 모든 과정에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유튜브를 보더라도 그 유튜버가 말하는 사실만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유튜버가 그것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라고 기억하고, 책을 읽을 때도 '그 저자가 그것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라고 기억하는 식이다. 이러면 설령 그 내용이 잘못됐거나 의도적인 거짓말의 결과라고 해도 그 정보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그 내용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라는 사실(이는 어쨌든 객관적인 사실이다)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에 호도될 가능성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저장된 내용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과정 속에서도 자성과 검증의 기회를 제공한다. 영희와 대화하며 "오늘 아침에 철수가 나한테 고래가 어류라고 말했어."라고 말한다면, 단순히 '고래는 어류다.'는 내용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제공한 특정인의 발화도 쟁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그 발화자의 신뢰도에 대한 생각 및 논의로 이어진다.


글이나 동영상, 타인의 말과 같은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 외에도 내가 실제로 겪음으로써 얻는 직접적인 경험 내용에 대해서도 이런 전략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색인 과정의 궁극적인 의의는 내가 섣불리 잘못된 믿음에 몰두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는 것이다. 앞선 맥락처럼, 만약 내가 현실에서 직접적인 어떤 경험을 했는데, 그것을 '일반화된 사실의 형태'로 기억하게 된다면, 나는 섣부르게 어떤 개별적인 사실을 법칙화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셈이다. 월요일 아침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오후에 비가 온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어쩌면 그날 하루를 마치고 자기 전, 오늘을 복기하며 '우산을 챙기지 않았더니 비가 왔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러한 기억은 '우산의 소지'와 '비가 내림'에 관한 잘못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고, 경우에 따라 강한 신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당신의 믿음이 오늘이라는 단 하루의 경우만을 사례로 포함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해당 예시가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과도한 일반화가 잘못된 믿음을 야기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하다못해 각종 미신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혹은 단 하나의 성공담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도전의 절대 진리인 것처럼, 그것이 성공 원리인 것양 설파하는 사람들과 그를 믿는 이들을 떠올려보라. 당신은 어제 산 미국 주식에서 비롯된 이익에 경도되어 "미국 주식을 사면 돈을 번다."는 식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사실은 "내가 어제 산 미국 주식이 오늘 나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줬다."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상기한 우산과 비의 관계 역시 "월요일 아침에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는데, 그날 오후에 비가 오더라."라는 구체적이고 단편적인 사실만이 주어진 정보의 전부다. 그 이상의 일반적인 원리나 법칙 같은 것은 없으며, 또한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인스타와 같은 SNS,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고 들은 단편적인 사례 같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기억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내용의 출처를 짝지어서 기억하는 것, 구체적인 믿음을 일반적인 사실의 형태로 확대해서 머릿속에 저장하지 않는 것은 기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용한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사실의 용어'와 '가치판단의 용어'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는 다소 미묘한 부분이다.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은 단순하지만, 어떤 용어들은 우리의 일상적 직관에 꼭 들어맞아 그 자체로 사실적인 기술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예시들로 시작해 보자. "오늘 광장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어제 날씨가 좋았다." "그 사람은 멋있다." 이런 표현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정확히 무엇인가? 혹자는 이런 표현들이 어떤 정보에 관한 사실적인 진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장소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누군가에겐 사람들의 수로만 치면 100명도 많고, 어떤 이에겐 광장에 집결된 인원치고 10,000명도 적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많이 모였다'는 것은 어떤 사실에 관한 진술 같지만, 실상 가치판단의 표현일 따름이다. '날씨가 좋았다'거나 '멋있다' 같은 표현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단, 그 진술을 수행하는 사람의 주관적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날씨는 기껏해야 맑거나 흐릴 뿐이며, 사람은 그 존재자로서 스스로 존립할 따름이다.


이런 구분의 의미는 '가치판단의 진술'을 접한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에 대한 것으로 인식하는 실수를 피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누군가 '제임스가 의심스럽다.'라고 말한다 한들, 그것은 그 사람의 의구심을 표현한 발화일 뿐, '제임스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에 관한 진술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말 역시 그렇게 판단하는 본인의 주관적 선호를 나타내는 것일 뿐, 그 판단의 대상이 되는 이의 객관적인 속성이나 성향 같은 것들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가치판단의 수사를 들으면서 그것을 사실적인 무언가로 받아들인다. 기분이나 느낌 같은 것들이 어떤 객관적인 진실이나 타당한 논증의 근거처럼 기능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런 맥락에서 나는 '쎄하다'는 말이 꽤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객관적인 진실을 추적하는 좋은 방법은 오로지 사실의 용어만을 쫓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어떤 정보를 보고 들을 때, 그 내용 전체에서 어떤 것이 객관적인 사실에 관한 담백한 진술이고, 또 어떤 것이 전달자의 주관적 편향이 함축된 가치판단의 용법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어떤 '객관적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가치판단의 용어를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특히나 강조의 수식어(굉장히, 매우, 엄청 등)는 자신의 정서를 전달하거나, 가치판단의 방점을 나타내기엔 적절하지만, 그런 표현들을 삽입한다고 해서 진실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실천하기 어려운 태도다. 나는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믿으며, 또 실제로 지적으로 탁월한 이들이 이런 구분에 있어 실수를 범하는 것을 자주 봤다. 자신의 느낌을 진술할 뿐인 것을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는 식이다. 이는 그 느낌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는 청자, 타인의 시선에서 볼 때 공허한 말로 들릴 수 있다.


다만 모든 평가적 용어나 강조의 수식어가 정보 전달의 맥락에 있어 그릇된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수채화는 훌륭하다."거나, "당신의 책 내용은 정보 전달의 측면에서 탁월한 것 같습니다." 같은 표현들은 가치평가적 용어를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표현들이 어떤 객관적인 요인을 지적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다. 또 그 용어 안에 함축되어 있는 객관적 · 중립적 판단 기준을 명시적으로 끄집어내서 그 타당성을 논의해 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주로 어떤 특정한 목적에 잘 부합하거나 혹은 잘 들어맞지 않은 것들에 관해 말할 때 발견할 수 있다. 혹은 우리에게 주어진 물리적 한계 때문에 실상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에 대한 합의된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섭씨 100도 이상의 물은 '뜨겁다'라고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그 물은 뜨겁다."라는 진술은 가치판단이긴 하지만, 어떤 유의미한 정보를 진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충분히 높지 않은 온도들에 대해 남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술했듯, 거짓을 분간하고 기만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방법들의 공통점은 나의 본능적, 혹은 습관적 판단에 안주하지 않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정보를 판별하려는 태도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한 인지적 피로를 수반한다. 다시 말해, 이는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신뢰가 기본값인 우리의 본성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인간 본연의 가치는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동물적 본성을 필요에 따라 극복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적인 삶을 방해하는 '본성의 껍데기'를 한 꺼풀씩 벗겨낼 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인간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뢰 자체가 죄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는 어쨌든 '더 잘' 믿을 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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