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계몽, 쾌락.
혹자는 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는 발전하고, 그 발전에 맞춰 사람들의 의식 역시 더 고차원적으로 발달할 것이라고. 즉,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계몽'될 것이라고.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계몽'이란, 우리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동물적 본능, 생물학적 본성 및 욕구에 정향된 의사 결정 경향이나 판단의 기준을 극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계몽된 인간은 먹을 것에 대한 갈망, 성적 욕망의 추구 등에 의존해 일차원적으로 무언가를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옳음'에 관한 개념이나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합리적인 판단 체계를 가질 것이라 기대된다. 이런 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소위 문명의 기술적 · 사상적 수준이 정교해질수록 이러한 계몽된 인간이 길러지기 쉽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주의가 간과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본능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적 · 제도적 역량이 발달할수록, 그 문명엔 필히 본능에 정향된 욕구를 끝없이 자극하는 기술 또한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보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사태를 단순화하여 두 진영으로 양분된 사회를 상상해 보라. 한쪽에선 사람들의 지적 욕구, 지성체로서의 잠재력을 믿는다. 이른바 계몽주의자들은 보다 많은 이들이 지적으로 성숙해지길 촉구하며, 그러한 이상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즉, 그들은 올바른 추론을 해내는 방법, 합리적인 믿음 체계를 구성하는 전략, 정의와 선(善) 같은 추상적 가치가 실현된 공동체의 이미지 같은 것들을 학습시키고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연구들은 해마다 증대 · 정교화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즉, '실용적인')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요컨대, 이들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목적을 위해 올바른 수단을 취하고, 인간성의 계몽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선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고, 그것을 손쉽게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기술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한다. 이들의 주목적이 그 자체로 사악한 것은 아니다. 즉, 이들은 현대인의 계몽을 억제하고 모두가 짐승과 같은 삶의 형태로 복귀하길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건 이윤(아마도 경제적인)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실천에 있어서는, 계몽주의자들과 여러 방면에서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은 '결과적으로는' 상기한 의미의 계몽이 경시될수록 그 사회에서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에 의거해 쾌락 사업가들은 명백한 악의 없이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사람들을 인간성의 추구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계몽에 필요한 것은 크게 의지, 인지적 자원, 시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올바른 계몽의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한 방법론 등도 필요하긴 하지만, 이것들은 외부에서 제공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 인간이 계몽에 이르기 위해 자기 안에서 끌어다 활용해야 하는 세 가지 요소가 바로 의지, 인지적 자원, 시간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내적인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자.) 예컨대 계몽을 위해선 당사자가 그러한 가치 추구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 그것이 옳다고 믿는 동시에 그것을 위해 노력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만 있다고 해서 곧장 계몽을 위한 여정에 주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성의 계도를 위한 전문 지식 및 방법론을 학습하고, 그것을 다양한 장면에서 실현하면서 능숙해지는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이 훈련을 위해서 끌어다 쓸 수 있는 집중력, 기억력, 인내력과 같은 인지적 자원이 필요하고, 또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용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계몽 과정의 추상적인 그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생업에 종사하거나, 직업을 얻기 위한 교육 과정에 놓여 있어 인지적 자원과 시간을 계몽에 할당하기 어려운 현실적 요건에 있다. 하물며 이러한 과업 수행에 대한 보상 심리로 일상적인 쾌락과 자극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런 단편적이고 소모적인 활동은 인간적 성장을 위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소진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들에도 얻어지는 손쉬운 만족은 '내가 왜 힘들여 가며 즉각적인 쾌감도 가져다주지 않는 인고의 훈련을 견뎌야 하는데?'와 같은 반발 심리를 야기한다. 즉, 계몽에 대한 의지마저도 꺾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모적 활동의 극단에 앞서 언급한 쾌락 사업들이 있다. 쾌락 사업가들은 교묘하게 사람들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고,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에 부합하는 신경 보상체계를 이용한다. 점점 더 짧고 단순하지만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문화적 단위로 내세우고, 무작위로 주어지는 쾌락의 기회에 길들여 어떤 목표에 대한 오랜 노력을 기피하게 만든다. 긴 호흡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성취는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을 예상 가능한 체계로 수립하고, 거기서 수반하는 고통 · 괴로움을 감내하길 요구한다. 그러나 이른바 숏폼 중심의 문화 양상은 이러한 '빌드업'을 단순히 '지루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아가 자신의 쾌락 중심의 안주된 문화 성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고루하고 하잘 것 없는 것인 양 비하하고, 깎아내리고, 조롱한다. 심지어 이를 위해 가짜 뉴스의 전파도 서슴지 않는다. "그거 알고 보니 아니라더라. 그럼 차라리 쾌감 충족에 주력하는 게 이득이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쾌락의 충족과 계몽의 요구는 출발선에서부터 기울어진 경쟁을 하게 된다. 계몽을 위해선 가치, 미덕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에 '동의'해야 하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타고난 체질을 극복하는 것이며, 자기 손으로 신체를 조형하는 정도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본성적 욕구에 기인한 쾌락의 충족은 그저 제공되는 콘텐츠를 끝없이 향유하기만 하면 될 뿐이며, 보상은 즉각적으로 주어진다. 과거였다면 오랜 노력과 복잡한 전개 끝에서나 얻을 수 있을 쾌감의 양보다 더 거대한 쾌락이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단순한 활동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양상은 이미 아주 어린아이 시절에서부터 인간을 길들이며, 계몽의 기치로부터 그들을 저만치 떼어 놓는다.
어쩌면 계몽주의자들은 바로 그 쾌락 산업과 기형적 문화 양상을 근본 문제로 지적할지 모른다. 이는 실제로 다소 진부할 정도로 많이 제기되는 담론이고, 심지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걱정인지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도파민 중독에 관한 신경생리적 우려를 생각해 보라. 그래서 그러한 염려와 통렬한 비판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른바 숏폼 중독에서 구제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경생리적 쾌락으로부터 절제와 인내를 스스로 추구하는 데 성공했는가?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그러한 문명의 '혜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여러 이유(일차적으로 얻는 쾌락, 그러한 콘텐츠들이 대화 소재가 되는 사회적 장면들 등)로 그것을 포기할 의지조차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 다수가 옳음이 되는 세상에선 욕망과 본능에 매몰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들이 다수일 수밖에 없고(우리는 계몽의 초입에 서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비판은 언제나 '소외된 진지함', '다수로의 도태' 같은 것으로 취급되기에 그렇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대결은 기술적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현대적 문화권에서 지속되고 있다. 상기한 그림은 어쩌면 이러한 대결에 대한 지나치게 비관적인 화풍일지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은 기술의 진보를 통해 확산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에 힘입어, 풍족한 여가 시간을 활용해 자신의 인간성을 도야시키려 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되길 바라지만, 당장으로선 이런 바람의 전망이 그리 밝진 않아 보인다. 쾌락 산업의 단위는 점점 짧고, 조그맣고,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 정작 그 단위 당 쾌락의 양은 줄어들지 않으면서 말이다. 미세 플라스틱과도 같은 그것들은 우리의 정신성에 침투해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닐지라도 어떤 안주와 체념을 유발한다. 시니컬함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멋진 패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포기와 좌절, 통제 불능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 물론 나는 인과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젊은이들 때문에, 이런 사회가 되었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쾌락 지상주의의 세태는 결과일지 모른다. 결국에 우리는 모든 책임을 어른들, 앞선 세대에 물을 수밖에 없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