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의미, 고통.
1.
홀로 의연하게, 고통을 감내해 본 사람은 느낄 수 있다. 나의 마음 속에서 생생하게 요동치는 괴로움과 비명소리가 입으로도, 눈빛으로도, 손끝으로도 표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는 기이함을. 소박한 지옥을 가슴속에 품고서 힘없는 미소나마 흘려야 할 때, 그 기이함에서 비롯되는 환멸, 공허감이 이 세계의 윤곽을 무너트린다. 농담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내적 실감과, 그 억겁의 고행을 천진하게 무시하는 외적 현실의 순수함 사이에서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자기 마음을 몰라 주어서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유리된 감각 탓에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실감의 소실은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이함을 역전시킨다. 그렇게 현실이 저만치 멀어지면, 마음은 더 이상 상식의 문법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지옥의 불길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이내 평등한 부정성의 잿더미만이 심장에 쌓인다. 새까맣게 타버린 심장을 경유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염증이다. 염증은 바지런히 신체 곳곳으로 순환하며 이내 감각을 포기하게 만든다. 통증을 충분히 오랜 기간 버티는 것은, 그 누구도 불가능하다. 때문에 길든 짧든,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체의 포기다. 그러나 통제력의 상실은 '나'에 대한 나의 친숙함마저 앗아간다. 이에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세계에서 추상적인 괴로움만 남게 된다.
말하자면, 의미론적 지옥이 도래한다.
2.
의미론적 세계의 주요 단위는 해석이다. 해석이란 인식적으로 주어진 대상, 표상 같은 것들의 위치를 특정한 의미론적 체계에 재배치하는 것이다. 영어 단어 'rain'을 비라고 해석하는 것은 한국어의 의미론적 체계에서 그것과 가장 근접한 요소로 대치한 결과다. 그것이 '대치(代置)'인 탓에 영어 문화권 사람들이 'ra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미묘한 감상, 문화적 함의, 가능한 은유의 목록들까지 곧장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석이 의미론적 동화(同化)가 아니라 '재배치'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이런즉, 해석의 본성은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해석이란 모든 것을 내 기준에 맞춰 뒤트는 과정이고, 의미론적 세계란 하나의 닫힌 공간처럼 여겨질 수 있다. 말하자면 유아론적 세계관인 셈이다. 아마도 가능한 변론이라면 해석의 본성이란 본래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거고 그 노력을 통해, 재배치의 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의미의 빈 공간이나 균열들을 수선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근거 삼아, 자신의 얼굴을 가꿀 수 있다. 때때로 깨진 거울을 교체하거나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의미론적 수선이란 그런 과정이다.
해석이란 해석자와 해석 대상을 필요로 한다. 해석이 의미론적 세계의 주요 단위인 탓에, 그 세계 또한 따라서 안과 밖을 상정한다. 하여 그것은 경계지어져 있고, 저마다의 윤곽을 가지고 있다.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질서지운다는 것이다. 책상은 사물로, 인간은 동물로, 석산은 꽃으로 구분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닌 바 의미론적 체계에 따라 이러한 경계들은 더 뚜렷하거나 더 희미해질 수 있다. 문외한에게 산길은 하나의 풍경에 불과하지만, 식물학자에겐 온갖 이름지어져 있는 식물들 각각의 공존이다. 그것들은 식물학자의 눈에서 윤곽을 얻는다. 즉, 구별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하나의 질서에 따라 정렬되어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그곳을 관장하는 법칙의 이름이 '고통'일 때, 그제야 의미론적 지옥이 오롯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에 고통은 감정 내지 느낌의 일종일 뿐이며, 특히나 우리의 인식적 차원에서 소위 '객관적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지각할 때, 그것에 관한 인식의 질서를 고통이 관장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는다고 반문할 수 있겠다. 아픈 사람이나 덜 아픈 사람이나 어쨌든 책상은 책상으로 보니까.
여기서 우리는 오염의 관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염은 기존에 있던 것을 없애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전환시킨다기보단, 그것들을 오염 물질로 덮어 씌운다. 그래서 '오염된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긴 하지만, 무언가 훼손되거나 감염된 상태라는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유비에서 '의미론적 오염'을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의미론적 체계 전반을 무언가로 덮어 씌우는 것이며, 훼손하고 감염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책상을 책상으로 보긴 하지만, 이 경우에 막연한 고통과 괴로움의 배경음을 수반한다. 이런 배경음은 '책상 때문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배경음이 틀어진 상태에서' 책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상시적인 고통의 배경음이 울리고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사물의 윤곽은 점점 흐릿해지고, 안과 바깥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진다. 그 세계의 모든 것은 고통과 연결된다. 마음이 지옥인 사람은 어딜 가나 지옥인 까닭이다. 그렇게 앞선 그림대로 모든 것이 고통에 물들어, 마침내 신체화가 전신을 지배하게 되면, 그는 인간의 존재를 가장 확고하게 보증해 주는 듯한 '신체'마저 포기하게 된다. 여기서 신체의 포기는 절단이나 낙인 같은 신체 훼손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극단적인 체념 상태로 접어드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외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소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입에 불평불만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냉소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 낙관적인 탓에, 세계에 대한 너무나도 이상적인 기준을 간직하고 있는 탓에 그러한 긍정성을 염원한 결과다. 말하자면 그들은 낙관주의자다. 낙관주의자만이, 끝없는 불만을 입으로 쏟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냉소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는 침묵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적응하거나 포기할 뿐이다.
4.
그렇게 '몸'을 포기한 자는 오염된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고통의 한 부분이 사라지거나 경감됐을 뿐, 지옥의 불길은 여전히 건재하다. 현실 감각이 부재한 고통에 끝없이 시달리다 보면, 여러 형태의 정신증을 겪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신 질환의 수반은 필연적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최후의 보루다.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경고인 셈이다.
운이 좋다면 이 과정에서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회복하고, 오염 물질을 걷어내기 위한 정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그렇게 현실감을 회복하고 타인과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그는 다시금 건강한 의미론적 수선에 종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이 그러한 지옥에서 살아가는 모든 거주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