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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의 입구

#60. 양과 질

by 사각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래서 개인의 생존을 위해선 타인의 인정과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연결이 극단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의 양립이 나에겐 기묘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자연스럽게 그 감정들로부터 타인의 존재를 바라도록 생물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작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에서 인간이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내밀한 친밀감을 공유하는 일은 사실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단순히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보이는 대로 행동하는 자연적 본성에만 좌우되어선 그 같은 목표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하는 말을 다각적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에 대한 정체성을 가늠해야 하며, 타인의 마음과 성향에 관한 여러 가설의 수립과 증명을 반복해야만 한다. 태어날 때부터 외로움과 고독의 씨앗─반드시 피어나기 마련인─을 품고 자라는 인간 존재의 처지를 고려해 보면, 이러한 당위는 더더욱 기묘하다.


우리는 친구나 가족, 연인을 이해하고 그들을 안다고 믿지만, 실상 그러한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실현되고 있는 경우들은 매우 드물다. 물론 우리는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미래 행동에 대한 예측, 그들의 내적 독백에 대한 추측과 가설, 그의 발화나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진짜 의도 같은 것들을 우리는 곧잘 추론해 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체로 틀리고, 자연적 본성에만 의존해선 도달할 수 없는, '나'와 다른 인간에 대한 타자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적어도 그것이 상당히 특수한 성질의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현저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차이가 양적인 차이든, 질적인 차이든 말이다.





물론 이 둘의 구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구분은 실제로 많은 경우에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다. 왜냐하면 '양적인 차이'라는 것은 적어도 숙고가 필요한 두 가지 쟁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는 양적인 차이의 비교가 언제나 하나의 기준─즉, 동일한 기준─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이라는 것은 둘 이상의 대상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을 구별하는 근거이다. 이때 그 대상들이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을 각각 가질 때, 우리는 그 대상들이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각 대상의 특징들이 서로의 것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빨간색'과 '2'를 보라. 우리가 이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하나를 색깔이라는 범주의 일원으로, 다른 하나는 숫자라는 범주의 일원으로 구분하여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때 색깔이 갖는 전형적인 특성은 숫자가 갖는 전형적인 특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반면 양적인 차이는 여러 대상들을 동일한 기준 아래 정렬시킴으로써, 그것들을 계열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나타난다. 예컨대 '사과 3개'와 '사과 5개'는 그것들의 개수에서 차이가 나며, 이는 동종의 것이 공유 가능한 양적인 차원에서 똑같은 기준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여기에 적용된 '동일한 기준'이란 '대상의 개수(개체 수)'이다. 이 지점에서 미묘한 쟁점이 드러난다. 양적인 차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대상은 부분적으로 양적인 비교를 허용하는 것 같다.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이 두 생물은 정말 많은 면에서 다르지만, '몸무게'라는 똑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다. 개미가 통상 약 3mg의 무게를 갖는다고 치고, 코끼리는 통상 약 4t(4,000)의 무게를 갖는다고 해보자. 그래서 코끼리는 개미에 비해 보통 양적으로 거대하다는 성질을 가지며, 이는 둘의 무게를 같은 단위로 치환해서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개미와 코끼리가 가지는 차이는 '양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은 다소 이상하다. 개미와 코끼리는 정말 다른(그래서 '질적으로 구분되는') 생물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쟁점은 어떤 특성에 관해서, 일정 규모 이상의 양적인 누적이 질적으로 특수한 성질을 새로이 발현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창발'(emgergence)이라고 한다. 예컨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의 본성(각 원자는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식의)은 모두 동일한다. 단지 차이는 각각의 생물군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많은 분자와 원자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혹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따라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차이는 이질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호모 사피엔스의 뇌에 포함된 뉴런과 시냅스의 개수는 다른 생물들을 상회한다. 그리고 그 양적인 차이가 인간에게 철학과 역사, 문학 등을 허용하게 됐다. 이러한 차이는 양적인 차이인가, 질적인 차이인가? 관점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말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서두에 언급한 '타자성의 본성'으로 돌아오자.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에 요구되는 내용은 양적인 기준에 따라 성립하는 것인가, 질적인 기준에 따라 성립하는 것인가? 즉,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가질 때 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특수한 내용을 가질 때 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한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다른 동물 개체를 이해하는 일과 비교해서, 뭐가 그렇게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앞선 쟁점들과 뒤섞여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인관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내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을 이해하고 있는가? 혹은, 그들은 '나'를 이해하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곧장 대답이 나오지 않은 관계들은,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엇에 기초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특정하는가? 내 생각에 이들은 모두 흥미로운 질문이며, 우리 삶에 중요한 쟁점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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