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삶의 의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마다 나는 비슷하게 답한다. 우리네 인생에 본래적으로 주어진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우리는 많은 현상을 '과학적으로', '원인과 결과에 따라' 해석할 수 있지만, 거기에 숨겨진 의미 같은 것을 발굴해 낼 수는 없다. 비가 어떤 체계의 '물의 순환 과정'을 거쳐 내리게 되는 것인지 규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강우 현상에 내재된 어떤 의미 같은 것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비는 그냥 내릴 뿐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실의 관점에서, 인간은 일정한 생물학적 과정에 따라 태어나고, 자라날 따름이다.
나는 방금 삶에 주어진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며, 몇 가지 과학적 설명의 사례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삶의 의미를 진화생물학에서 흔히 말하는 유전자 보존이나 번식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지, 구태여 '없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성적 결합을 통해 자신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후대에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것은 인간의 신경생리적 시스템에 내재된 프로그램 같은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곧장 우리네 삶의 의미로 상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유전자 보존을 대체로 지향하는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할 뿐이다. 즉, 그것은 물이 순환해서 비가 내린다는 식의 설명에 다름 아니다.
또한 나는 허무주의를 주장하거나 죽음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허무주의는 별로 그럴듯하지 않으며, 죽음에 관한 예찬은 다소 극적이고 병리적인 구석이 있다. 마치 연극 위에서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어떤 종류의 종말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캐릭터성에 내재된 과장된 대본에 심취한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사람들은 으레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서 논리적 모순과 오류가 일상적인 말과 생각들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죽음은 좋은 것'이라는 스탠스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는 '좋은 것'의 의미를 세계의 바깥에서 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많은 성찰과 설명을 필요로 하는 전제지만, 이런 이들은 대체로 그것을 그냥 가정한다. 따라서 이에 관해선 별로 진지하게 논하고 싶지 않다.
추측컨대, 삶의 의미를 좇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주변 세계에 명확한 질서를 부여해 줄 하나의 배경 설정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삶의 의미란 이런 것'이라는 특정한 선언으로부터,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이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구나, 그래서 내 주변 사람이 나에게 저렇구나 하는 포괄적인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셈이다. 실제로 이런 배경 설정을 제공하고자 하는 많은 이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선언을 인스타에 올리고,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더 심각하게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독특한 처지에 있다. 우리는 사실상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인식할 수 있지만(특히나 도구를 이용하면 그렇다), 각자의 마음에 대해선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은 실질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셈이다. 고립된 정신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이 주는 생동감에 취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삶을 내 주변 사람들의 것보다 '더 실감 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게 되거나, '더 가치 있고 뜻깊은 것'으로 오인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의 시간적 밀도는 아주 근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물리학적 동일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이를테면 정확히 한 달 전의 하루를 떠올려 보라. 그때 무엇을 했고, 그 하루의 인상은 어땠는가? 일 년 전의 오늘은? 가령 2010년의 한 해에는 어떻게 생활했고, 그때 무슨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로부터 어떤 생각을 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정확하고 구체적인 답변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이다. 심지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조차,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극단적으로 축약하고 요약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네 인생은 무수한 1초, 1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엄청난 시간과 정보량을 우리의 정신은 제각각 처리할 수도, 저장할 수도 없다. 어린 시절의 기나긴 하루하루가 지금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대부분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날들은 또 어떻고? 나나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적 무게는 나나 당신의 정신이 오롯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이제 거리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나나 당신만큼이나 무거운 업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만 약 5000만 명이 있고, 중국에는 약 13억 명이 있다. 세계적으론 80억 명이 넘는다. 가령 우리나라에선 강원도와 충청도만 해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의 궤적이나 형태가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다. 이른바 시골과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섬 같은 특수한 생활환경에서 지낸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 지구 전체의 면적에 견주어 보면, 한반도 전체의 면적은 2300분의 1일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라. 그 2300개의 한반도 안에 있는 강원도와 충청도를 상상해 보라.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는 것은, 실은 어느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저마다의 삶을 이런 식으로 수학적 · 통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하고, 부당하다. 서울에 사는 아무개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아무개도 정신적 경험, 마음의 구성요소, 생활의 형태 같은 것이 유사할 수 있다. 그러니 철수의 삶에 대한 주관적 깨달음도 제임스의 인생에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나는 그러한 긍정적 효과까지 전부 부정하고 무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삶의 의미'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질서지우기 위한 최고의 배경 설정이 무엇인지, 본인에게 주어진 인생의 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묻는 것이며, 의지할 만한 하나의 신념,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을 만한 하나의 이정표를 달라는 셈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도 그것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답했다. "삶에 본래적으로 주어진 의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처럼 '찾으려' 해서도 안 되고, 남에게 '구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곤 곧잘 이렇게 덧붙인다. "삶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고', '부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습니다."
80억이 넘는 삶과 시간, 생활과 주관적 세계가 있다. 그들 각각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있고, 과업이 있고, 사정들이 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세계는 넓고, 우리의 삶에 열려 있다. 하나의 가치관, 하나의 신념으로만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마시고, 열 개의 의미, 백 개의 가치관으로 삶을 대하시라. 필요와 목적에 따라 여러가지 배경 설정을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갈고닦으시라. 그러면 인생의 의미를 좇을 필요도 없이, 삶을 스스로 이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