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우울한 편지>
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이 잊었던 옛 노래 한 곡을 데려와주었다.
유재하, <우울한 편지>
20대의 내가 무척 좋아했던 곡. 잊을 만하면 리메이크되고 영화에서도 곧잘 흘러나왔던 곡.
저항 없이 클릭하니 유재하가 아닌 흑인 소년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부른 영상이었다.
나이 어린 외국사람이 불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원곡을 잘 소화한 호소력 짙은 목소리. 그 노래가 마중물이 되어 내 플레이리스트에선 유재하의 원곡들이 차례차례 불려 나왔다.
아... 유재하다.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유재하의 노래가 있었다는 안도감.
가장 놀란 것은, 30년이 넘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멜로디와 편곡이었다.
유재하의 음색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어린 아이도 가사를 베껴 쓸 수 있을 정확한 발음. 알맹이 있는 목소리.
기교 없이 담담하게 직진하는 발성. 그럼에도 공기 반 소리 반의 노래들보다도 더 짙게 파고드는 소울.
잊었던, 익숙한 가사가 흐른다.
아마도 사랑 앞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연인이 보낸 듯한 편지.
사랑의 인력만큼이나 커지는 불안을 더이상 ‘가방 안 깊숙이’ 넣어둘 수 없어 꺼냈을 질문들.
‘나는 너에게 괜찮은 사람인 거니?’
‘감히 내가 사랑이란 걸 해도 될까?’
스물한 살의 10월. 그리고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선선한 저녁이었다.
대학교 정문 옆에는 하늘색 공중전화 부스가 대여섯 개 줄지어 있고, 부스마다 늘어선 긴 줄 어느 틈엔가 서서 나는 과외수업 학생의 번호가 찍힌 삐삐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과외 취소를 알리는 메시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귀가하기는 어쩐지 아쉽다는 마음으로 부스에서 나오던 찰나, 바로 옆 부스에서 나오는 선배와 마주쳤다. 선배는 같이 축구하는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날, 나는 혼자 좋아한다고 믿었던 선배와 예정에 없던 저녁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술을 마셨고, 그로부터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다. 공대 예비역인 그가 사실은 우리 과에 들어오기 위해서 재수를 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까지.
날 좋아한다고? 고백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주에서 길을 잃은 기분’
갑자기 세계가 낯설었다. 나 자신도 낯설었다.
사랑받는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주’라는 생각지도 못한 세상에 갑자기 초대받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짓말 같은 그 사랑을 상대가 거두어 갈까봐, 그것이 사랑스럽지 않은 나 때문일까봐, 나는 두렵고, 불안하고, 겉돌았다.
그렇게 마음의 ‘가방 안 깊숙이’ 우울한 편지를 넣어 다니던 나는 결국 ‘당신은 내 누더기 이불 속으로 들어와야 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시 구절을 베껴 선배에게 편지를 보냈고, 선배는 어느 날 답장 대신 ‘왜 그렇게 누더기만 보여주려고 했느냐?’는 말과 함께 나를 떠났다.
그렇게 내 첫 연애는 트라우마 버전으로 끝이 났고, 고작 한 달이 조금 넘는 짧은 연애였건만 그 상흔은 꽤 깊고 오래 갔다.
그 시절, 너무도 내 이야기라 믿으며 빠져들었던 노래,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하지만 트라우마가 극복된 걸까, 나이가 들어서 안목이 좀 넓어진 걸까.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들은 노래에서는 우울한 편지를 쓴 연인의 마음이 아니라 그 편지를 받은 화자(아마도 유재하)의 마음도 보였다.
나를 바라볼 때 눈물 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 없이 서로를 믿어요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가요, 아는가요
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우울한 편진 이젠...
유재하의 답장이다.
아마 그 선배가 주고 싶은 답장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에게 중요했을 뿐, 그들이 원한 것은 사랑뿐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껏 받는 것이 그에게 한껏 주는 일이었을 텐데...
나도 불안했지만 그런 나를 보는 그도 참 울적했겠다...
그런 마음들이 유재하의 목소리에 실려 가만가만 지나갔다.
제목이 ‘우울한 편지’인 것은 어쩌면 나의 연인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사랑을 경계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즉 편지를 받은 사람의 우울한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지.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듣게 된 이 노래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아무 관계 없다’는 그 마음을, 그 답장을 이제야 나는 조금, ‘받았다’.
사랑하는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누더기 이불’이라는 통과의례가 필요했던 그 시절의 나도, 누더기 초대장 속에 담긴 연인의 진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젊은 시절의 그 선배도 이제는 얼추 이해한다.
그래도, 그 시절로 돌아가서 제일 하고 싶은 거, 되고 싶은 게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괜찮은 사람도 말고, 그저 한껏 사랑받는 여자친구가 되어보고 싶다고.
세상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남모르는 보석을 발견한 듯한 그 눈빛의 연금술에 이끌려 나도 금이 되고 보석이 되는 순간들을 그냥 맘껏 누려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