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밀회’를 내 최애 드라마라고 소개하는 것은 늘 약간의 망설임이 따랐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 때문인지, 20대의 유아인과 40대의 김희애가 수위 높은 배드신을 찍었다는 입소문의 영향인지, 혹은 작품만큼이나 화제를 모은 패러디물 ‘물회’ 속 김영철의 번들거리는 얼굴과 한껏 벌어진 콧구멍이 떠올라서인지 사람들은 내 최애 드라마 선택에 대해 진지한 동의를 하기 어렵다는 표정들을 짓곤 했다. 게다가 자신의 방에 처음 놀러 온 혜원(김희애 분)의 발이 더러워질까봐 정신없이 방바닥을 걸레질하는 ‘선재(유아인 분)의 상남자다운 등짝’이 자녀교육을 제치고 강남 엄마들의 제1 화제로 등극했다더라는 등의 풍문을 접할 때는, 연하남의 쏟아지는 테스토스테론에 흥분하는 아줌마 대열에 합류한 듯한 미심쩍은 자기 검열에도 발이 걸렸다.
좋다,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고도 ‘밀회’는 여전히 내 최애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주제가 내 취향이라서? 스토리가 흥미진진해서? 연기자들의 연기가 명품급이라서? 모든 게 다 맞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밀회를 추억할 때 망설임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선재의 방’이다.
재벌가의 온갖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예술재단의 실장 오혜원. 우연히 혜원의 앞에 나타난 가난한 청년 선재는 음악적 재능과 혜원에 대한 거짓 없는 사랑으로 재벌가의 우아한 노비를 자처하며 살아가던 혜원의 마음과 삶의 토대를 흔들리게 한다. 이미 자신만의 삶의 문법이 확고한 혜원은 선재라는 세계의 가능성을 부정해보지만 선재는 전혀 다른 삶의 문법과 방어하지 못한 신경망을 통해 혜원의 삶 속으로 들어 오고, 이윽고 혜원은 ‘선재의 방’으로 가게 된다.
날 선 빛의 세상에서 숨통을 조이는 코르셋을 입고 살아가던 혜원은 생활의 때가 켜켜이 앉은 선재의 어둑한 방에서 코스튬과도 같던 오혜원 실장의 옷을 벗는다. 빗길을 뛰어오느라 흠뻑 젖고 선이 뭉개진 혜원의 옷들이 선재의 방 한 켠에 힘을 뺀 채 나지막이 널려있고 그 너머로 처음 서로의 몸을 만나는 여느 연인과 같은 머뭇머뭇하는 기척과 매끈하지 않은 대화가, 음악인 듯, 시인 듯, 흐른다. 그 방에서 혜원은 계란판으로 방음벽을 만들어 붙인 울퉁불퉁한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듣고, 선재와 농담을 하고, 웃고, 마침내 꿀잠을 잔다. 그러고선 혼자 옥상에서 컵라면을 먹고 편지를 남긴 채 선재의 방을 나선다.
나 오혜원. 일하러 간다.
이건 내 개인 전용 번호야.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난 네 집이 마음에 들어.
어제 나 혼자 들어갈 때는 좀 겁이 났지만...
위험했지. 가파르고, 비가 와서 미끄럽고.
다시 내려갈까, 계단 하나마다 망설였어.
그런데 그 순간에도,
넘어지면 안 된다. 혹시라도 다리가 부러지면,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 조심했단다.
그렇게 계단을 무사히 올라, 어둡고 비좁은 통로를 지나가는데
참 좋더라. 여기를 지나면 네 집에 들어간다는 게...
불을 켜고, 하마터면 울 뻔했어.
이게 집이지.
집이란 이런 거지.
난 어디서나 주로 서 있고, 때로는 구두를 신은 채로 자는 사람이잖니.
그 공간이 온전히 나한테 허락된 것 같았고, 너희 어머니께 감사했어.
그래서 내 맘대로 막 왔다 갔다 했어.
하지만, 또 누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게 되더라.
나야 각종 거짓말에 이골이 난 사람이지만,
너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잖니. 내가 더 조심해야지, 그런 유치한 생각.
그런데, 너도 많이 조심해 줬으면 해. 이건 더 유치한가.
아, 사발면 하나 먹었어.
후룩거리면 너 깰까봐, 옥상에 나가서.
뭘 그렇게 맛있게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몰라.
네가 한 말이 생각나더라. 어깨가 빠지도록 연습하면서, 라흐마니노프를 파가니니를
끝까지 즐겨주는 거. 최고로 사랑해 주는 거.
그게 무슨 뜻인지 실감이 났어.
난 참 이상하게 살잖니.
그래서 이제 나는, 네 집을, 너라는 애를
감히 사랑한단 말은 못 하겠어.
다만... 너에게 배워볼게.
그러니 선재야,
영어, 독일어 잘 몰라도 한없이 총명한 선재야.
세상에서 이건 불륜이고, 너한테 해로운 일이고 죄악이지.
지혜롭게 잘 숨고, 너 자신을 지켜. 더러운 건 내가 상대해. 그게 내 전공이거든.
엄청 오글거렸지. 이제 손 발 펴고, 아침 먹어.
친구에게 “나에게도 ‘선재의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하니, 선재의 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선재의 존재’라는 위험 수위의 농담을 한다. 그럴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퀘렌시아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스페인 투우장에서 소가 지친 몸을 회복하고 다시 힘을 내기 위해 숨을 고르는 피난처, 안식처를 의미하는데 현대에는 힘들고 지칠 때 자신을 치유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집이든, 작업실이든, 어느 숲이나 바다든, 세상이 강요하는 질서에 나를 욱여넣기를 멈추고 다시 나의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 내가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공간. 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공간. 무엇보다도 꿀잠이 쏟아지는 곳. 그곳이 ‘선재의 방’이 아닐까.
그런 세상으로 날 이끌어줄 선재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비록 선재는 없을지라도 지리멸렬한 세상의 어느 골목 한 귀퉁이에 내가 숨어 쉴 수 있는 작은 우주, 나의 퀘렌시아도 거기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