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07.
“도화단의 숙소가 있다고는 하지만, 3층에는 내려가 볼 수 없습니까?”
가족관계라던가, 학력사항이라던가, 리아가 작성한 입단서를 가볍게 살피던 한울은, 아쉽다는 듯 히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남자와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히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도 한울은 지지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랫 층인 2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것 정도도 어려울까요.”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네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시면 되잖아요.”
“아···”
정말 생각치 못했는지, 한울이 깨달음의 탄성을 내뱉자, 호국이 혀를 찼다.
“히나씨, 이 녀석은 남자가 아니라 그냥 멍청이에요.”
“아무리 멍청이셔도, 성별이 남자 분이시라면 도화단원의 숙소에는 출입하실 수 없어요.”
생각보다 완강한 히나의 태도에, 한울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3층 도화단원의 숙소도 전부 살펴서, 흑호교 내부의 사정을 두루 알아봐야 하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스스로의 옷 속에 손을 넣자, 그렇게 부채를 꺼내려하자, 리아는 약간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한울이 히나를 기절시키려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린 거였다.
“어려서 부모님 두 분을 잃고 혼자서 힘겹게, 절 키워주신 오빠예요, 제가 지내게 될 숙소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해요. 한번 정도만 함께 둘러볼 수 있게 해주세요.”
사토 히나는 리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리아는 두 주먹을 꼬옥 쥐고 몸을 떨었다. 그녀가 눈을 피하지 않자, 히나는 이내 짧은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하지만 오늘 일은 전부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외부에 알려지면 발칵 소란이 일어날테니까.”
히나는 호국과 한울까지 데리고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리아는 연신 감사인사를 입에 담았다. 약간 머뭇거리는 듯 했으나 히나는 결국 3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연신 ‘절대 비밀로 해야한다’, ‘도화단원은 쿠로 키츠네님과의 만남만 허용된다.’는 둥, 경고의 말을 덧붙였다.
3층의 문이 열리고서, 호국은 흡,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꽃 향기가 머릿 속을 뿌옇게 지워나갔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단조로워지고, 몸의 신경이 한번에 일깨워지는 듯한. 알 수 없는 기이한 감각에 한울은 옷소매로 코를 가렸다. 리아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히나를 따라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향했다.
“히나씨, 여기저기서 좋은, 좋은 향기가 나요오···”
리아의 말끝이 늘어지자 호국은 한울처럼 옷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히나는 그런 두 사람을 흘겨보면서도 별 다른 말은 보태지 않았다. 리아가 약간 비틀대며 걷자 한울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리아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자신의 몸을 의탁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히나 만이 익숙한 듯 희끄므레한 연기 속을 바르게 걸어다녔다.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저 역시 적응이 힘들었어요.”
“도대체 이 달콤한 향기와 안개처럼 희미한 연기들은 다 뭡니까.”
“글쎄요. 도화단원의 몸에서는 고운 체취가 나야 하니까···”
한울은 쯧, 혀를 찬 뒤 되물었다.
“마약입니까?”
“···”
날카로운 직구에, 히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울은 리아를 안은 팔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쏘아보는 히나를 느슨하게 바라보았다. 일말의 주눅도 없이 기세좋게 자신과 맞서는 한울에게, 히나는 흥미롭다는 듯 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한참동안 서로를 주시하던 두 사람 중, 입을 먼저 뗀 것은 히나였다. 앞서 보여주었던 여리여리한 심약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리아씨의 오빠라고 했었나. 당신, 정체가 뭐죠?”
“말했잖아, 리아의 소중한 오빠, 아니 보호자···”
한울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뭐,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님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주인님?”
한울의 말에 놀란듯 히나가 눈을 치켜떴다. 앙칼진 고양이같은 그 날렵한 눈매에, 한울은 까딱 잘못하다간 그녀에게 할퀴어지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울이 히나와 기싸움을 하는 동안, 호국은 코와 입을 막은 채 3층 복도를 빠르게 걸어나갔다. 그리고 닫힌 문들을 열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는 전라에 가까운 차림의 여성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들은 향에 취한 듯 하나같이 몽롱한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행동과 말은 기이하게 여겨질 정도로 느렸다.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는 여성이 드물어 보일 정도로, 말 끝은 형편없이 뭉개져 있었다. 헐벗은 여성들은 복도에서 서 있는 한울을 보고,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잖아, 위대하고 존엄하신 쿠로 키츠네 님이신가··· 저희를 보러 친히 와주셨나요?”
발가벗은 듯한 차림의 여성들은 비틀대며 한울에게 모여들었다. 호국은 눈쌀을 찌푸렸다. 다들 정신이 혼미해서, 남자라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쿠로 키츠네로 오인하고, 이렇게···
“종교내 성상납도 이뤄지는 모양이군.”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한울은 혀를 찼다. 리아는 그의 품에 안겨서 쌕쌕 숨을 가냘프게 내쉬었다. 한울은 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도화단원의 숙소도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이제 2층으로 내려갑시다.”
“잠깐.”
리아 대신 히나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는 대뜸 한울을 가로막고 섰다.
“정체를 밝히기 전에, 당신들은 여기서 한 걸음도 못 빠져나가.”
“궁금해?”
“뭐?”
힘이 빠진 듯, 리아의 무릎이 꺾여 주저앉으려 하자, 한울은 리아를 자신의 어깨에 걸쳐맸다. 무겁지 않았다. 한울은 리아가 불편하지 않게 그녀를 둘러맨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조그만한 체구의, 하지만 당당한 기세의 히나에게 되물었다.
“궁금하느냐고.”
한울의 말에 히나의 눈썹이 높게 치켜 떠졌다. 호국은 한울에게 덤벼드는, 아니 안기려 드는 도화단원들을 부드럽게 제압했다. 호국이 조금만 힘을 실었음에도, 그녀에게 떠밀린 여성단원들은 우후죽순 가냘프게 쓰러졌다. 한울은 리아를 어깨에 매고서, 그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엉덩이 부근에 손을 가져다댔다. 손이 닿자마자 으음, 낮게 신음을 흘리는 리아 때문이었을까, 한울은 다시금 쯧, 혀를 찼다.
“너희들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이 미약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고, 종교단체라는 흑호교가 어째서 아름다운 여성 신도들만 따로 불러모아 이렇게 홀딱 벗겨놓았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그 빌어먹을 쿠로 키츠네 녀석, 망할 놈의 머리통에 무슨 썩어빠진 생각이 들어찼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겨우 내 정체가 궁금해?”
한울의 말에 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녀석, 쿠로 키츠네의 충직한 성노리개로 살기 위해 태어났느냐?”
한울의 마지막 말에 히나는 즉각 풉,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배를 잡고 웃던 히나는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복도의 끝을 가르켰다.
“···아아, 2층으로 가는 길은 저 쪽이에요.”
히나의 말에 한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히나는 한울의 앞을 가로막던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마나 웃었는지 눈꼬리에 눈물방울까지 맺혀있었다. 히나는 한울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말을 이었다. 고양이 눈은 더 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냥 저를 따라오세요, 단원들의 성상납이 이뤄지는 지하 2층까지 안내할테니···”
약에 취한 도화단원들을 모두 밀어 넘어뜨린 호국이, 히나와 한울의 대화에 그제서야 토를 달았다.
“사토 히나씨, 당신도 평범한 도화단원이 아닌 거죠?”
“글쎄요.”
히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쿠로 키츠네의 충직한 성노리개로 살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죠.”
히나는 2층으로 향하는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맑은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끈적거리는 꽃향기는 조금 닦여나갔다. 히나는 손짓으로 문 너머를 가르켰다. 그녀의 등 뒤로 어둠이 펼쳐지고 있었다.
“왜 우리를 돕는거지?”
한울의 물음에, 히나는 한쪽 눈을 찡긋 해보였다.
“글쎄, 우스꽝스러울만큼 정의로워 보여서?”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비상구 문 앞에 선 한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히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저는 일본의 V 신문사 정치부 기자, 사토 히나입니다. 부정한 정치자금 사건으로 직장동료와 함께 흑호교에 잠입 해 취재하는 중이에요.”
공손히 인사한 히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서 한울을 응시했다. 붉은 입술로 히나는 물음표를 건냈다.
“자, 그럼. 쿠로 키츠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당신의 정체는?”
히나의 인상이 바뀌자, 한울은 뒤늦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 이름은 한울. 흑호교를 박살내기 위헤 잠입한 퇴마사.”
흥미로웠는지 흐응, 콧 소리를 낸 히나는, 한울의 뒤에 선 호국과 눈을 맞췄다. 자신의 차례를 알아차린 호국 역시 자세를 바로하고, 스스로를 정성껏 소개했다.
“비구니인 호국이올시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재발 법사고 한울 녀석과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우린 VIP로부터 의뢰를 받아, 흑호교의 비밀 문건을 외부로 반출하려고 합니다.”
“서로 뜻이 맞는군요. 성공한다면 내부 문서를 공유해 줄 수 있나요?”
히나의 물음에 한울이 앞서 답했다.
“당신 하는 거 봐서.”
“한울씨, 날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군요?”
“길잡이 그 이상의 도움을 준다면.”
한울은 어깨에 걸쳐진 리아가 괴롭지 않게,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였다. 세 사람은 비상구 문을 통해 2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아의 엉덩이에 자연스레 손을 얹고 있는 한울을 보고, 뒷따라오던 히나가 질문을 던졌다.
“아까 리아씨의 주인이라던 건 무슨 소리예요?”
“아아···”
한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녀석, 보다시피 내 강아지라서.”
히나의 눈이 의문으로 커졌지만, 한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호국이 입을 닫은 그 대신 나서서, 이해하세요, 저 녀석. 이래저래 조금 돌아버린 녀석이라, 며 적당한 해명을 해 주었다. 히나는 궁금증이 전혀 해소 되지 않은 듯 했지만, 더 이상 묻기도 어려워 그만 입을 다물었다.
2층의 문을 열기 전, 한울은 리아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 세웠다.
“정신은 좀 어때?”
“어지러워요, 한울님.”
“걸을 수 있겠어?”
“하시는 일에 방해되지 않을게요.”
“걸을 수 있겠냐고.”
“네네.”
리아가 애써 정신을 차리려는 듯 주먹을 꼭 쥐자, 한울은 도로 어깨에 맬까, 잠시 고민했다가 그만두었다. 작고 드센 히나가 리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까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조그맣고 까만 고양이가, 큼지막하지만 순한 대형견 앞에서 마구 덤성거리듯, 히나는 리아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뽀작대며 스트레칭을 도와주었다. 호국은 입을 가리고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히나씨와 리아씨는 나쁘지 않은 조합이네.”
“조합같은 소리하네.”
“꼭 귀여운 고양이와 강아지 같잖아.”
“리아가 정신이 들면 바로 2층 문을 열거니까, 그렇게 알아.”
호국의 말을, 한울은 가볍게 무시했다. 호국은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얌마, 나는 어떤 동물 같아?”
생뚱맞은 질문에, 호국을 크게 훑던 한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잠시 달라붙었다. 호국은 낮은 목소리로, 설마, 설마 하더니 얼른 되물어왔다.
“설마, 젖소는 아니겠지.”
“젖소같은 소리하네. 얌마, 너는 그냥 금수같은 땡중.”
“얌마!”
한울과 호국의 대화가 폭력으로 치달을 때 즈음, 눈빛이 초롱하게 돌아온 리아가 기척을 해 왔다. 리아의 안색을 살핀 한울은 2층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진중하게 울려퍼졌다.
“자, 여우 사냥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