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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니까···.

빛 아래 설 너에게 08.

by 다우

2층은 벽마다 방음처리가 되어있었다. 히나의 설명에 따르면, 단체 군무를 준비하는 4층과 달리, 2층은 단원들이 노래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했다. 연주실 옆 작은 탈의실을 지날 적에, 히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울의 옷 끝을 잡았다.


“잠시만 기다려줘요,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 하니까···.”


빠른 속도로 탈의를 마친 히나는, 청바지 차림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다시금 양해를 구한 뒤, 텅 빈 연주실로 들어가, 내선번호를 통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흑호교 내부 사람에게 밀고하는 겁니까?”


한울이 눈썹을 치켜뜨자, 히나는 후후, 소리내어 웃었다.


“흑호교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위해서 사무를 보는 행정실에 동료가 회계직으로 잠입 중이에요. 우리의 예상보다 일이 빨리 처리 될 것 같아, 한울님과 지금 행정실로 가고 있다고 연락하는 겁니다.”


히나는 자신의 가슴 쪽에 손을 넣어 속옷 틈에서 소형 카메라를 꺼냈다.


“흑호교 내부 사정은 이미 충분히 기록해두었으니, 스즈키씨가 조사한 회계자료와 함께, 한울님의 비밀 내부문건을 공유받는다면···.”


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한울님께서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일은 없을거야.”


한울의 기백에 히나는 흡족한 듯 웃음지었다.


“그래요. 흑호교를 소탕하길 바라는 한국의 VIP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우린 그보다 빨리 취재 내용을 자국에 보도 해야 하니까, 우리로서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군요.”


연결이 된 듯, 히나는 한울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고, 전화기 너머 남성에게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즈키라는 이름이 몇 차례 입에 올랐고, 히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듯 속사포로 말을 꺼냈다. 상대는 묵묵히 히나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짧은 호응을 마지막으로 히나는 전화를 끊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군요. 1층 로비에서부터 보안요원들이 결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즈키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까 5층에서 머무르던 직원 여럿이 무전기로, 외부 침입자에대해 상부에 보고했다고 하네요.”


히나는 작은 가방에서 날카로운 너클 한 쌍을 꺼내 손에 끼었다.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무기에 호국이 웃음을 터트리자, 히나는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작아도, 한 사람 몫은 너끈히 할 수 있습니다.”


히나의 당찬 모습에, 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옆에 놓인 공구박스를 살펴 작은 망치를 하나 꺼냈다.


“망치로 뭘 하겠다고.”

“저, 저도 한 사람 몫을···!”


입술을 꾹 깨문 리아를 보며, 한울은 웃음을 터트렸다.


“휘두르다가 놓치게 될거야.”


리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얀 치아로 자신의 옷 소맷단을 꽉 깨물었다. 쫘악, 원단이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울려퍼졌다. 길게 찢어진 원단으로, 리아는 망치와 자신의 오른쪽 손을 묶었다. 왼손을 쓰는 게 익숙치 않던지 자꾸만 풀렸지만.


“이리 와 봐.”


한울은 찢어진 원단을 대신 전해받아, 리아의 오른손과 망치를 꽉 묶어주었다. 리아는 그가 자신의 손을 매만지는데에도 싫은 내색없이 가만히 몸을 맡겼다. 빨간 자국이 남을 만큼 원단을 단단히 묶어준 한울에게, 리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절 구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저도 한울님을···.”


한울은 리아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다. 리아가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얹어진 한울의 손을 조심스레 매만지자, 한울은 아무런 말도 없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1층으로 향하는 비상구로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생각말고, 주인님이 앞장 설테니 뒤에서 잘 쫓아와.”


한울의 말에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멍이, 대답.”

“네, 네!”


당황한 리아가 얼른 대답하자 한울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주종관계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모습에 호국은 키득대며 웃었다. 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토를 달지 않고 한울을 도도도, 쫓아갔다.


1층 로비의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와 비상구를 향해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 검은 옷을 단체로 맞춰입은 남성들이 족히 서른 명은 되어보였다. 그들은 한울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울은 품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다.


“어이, 호국. 이 정도 상황에서는 도력을 써도 납득이 될 만하지 않나.”

“민간인들이지만, 그 수가 꽤 많고···.”


호국의 눈이 보안요원들의 손에 들린 단검에 가닿았다. 날이 선 단검은 깜빡이는 형광등의 빛을 우악스럽게 퉁겨내고 있었다. 호국은 넉살좋게 말을 이었다.


“다들 무장한 상태니까 말이야. 무력만으로는 안될 것도 같네.”


호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한울은 부채의 살을 넓게 펼쳤다. 부채의 살이 쫙 갈라지는 시원스런 소리. 보안요원들은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부채 소리를 기점으로, 일제히 한울을 향해 뛰어들었다. 로비에 세워진 전신 거울이 휘청거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남성들의 고함이 사납게 귀를 때렸다. 매섭게 소리치며 덤벼드는 사내들에게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한울은 역으로 그들에게 달려나갔다.


한울은 요원들의 다리 방향으로 부채를 한 번 세게 파닥였다. 그러자 요원들은 달려오던 것과 반대 방향인, 뒤쪽으로 세 보 가량 밀려났다. 한울은 서 있던 자세에서 무릎을 굽혀, 몸의 중심을 조금 낮췄다.


“호국! 리아와 히나를 감싸 안아!”


한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크게 외치자, 호국은 그 말의 의도를 빠르게 이해하고 법복 상의의 끈을 풀어 리아와 히나를 뒤로 숨겼다. 호국이 빠르게 상의의 끈을 풀어내자 한울은 거침없이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둥글게 반 원을 그리며, 한울은 부채를 세로로 세웠다. 물결치듯 범람하는 큰 바람을 일으키자, 유리창과 함께 거울이 삽시간에 깨져나갔다. 바스라지듯 튀어오르는 유리조각들이 요원들의 몸과 얼굴에 박혀,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리아와 히나는 호국의 법복으로 앞이 가리워져 조금도 상처나지 않았다. 하지만···.


“호국씨!”


호국의 뺨에 얇은 실같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리아와 히나는 얼굴에 유리조각이 박힌 호국을 걱정하며 허둥거렸다. 호국은 별 것 아니라는 듯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계면쩍음이 묻어났다. 한울은 리아와 히나의 외침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보안요원들이 어둠 속에 녹아들어, 한울의 헛점에 파고 들었다.


사방에서 칼날이 날아오자, 한울은 빠르게 몸을 틀었다. 춤을 추듯, 뾰족한 쇠붙이들을 피한 한울은 큰 소리로 외쳤다.


“멍청한 땡중녀석, 네 이름까지 줄줄히 호명해야 되는 거였냐!”

“아아, 어련히 알아서 잘 피하겠냐고.”

“못 피하니까 하는 말 아니냐!”


호국에게 핀잔을 준 한울은 부채의 살을 빠르게 접어, 부채를 일자 나무토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요원들 속을 파고들어 심장 부근을 쿡 찌르거나 명치를 두드렸다. 한울의 부채에 닿은 요원들은 컥, 숨이 막히는 듯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열, 열 하나, 열 둘···. 요원들은 닿는 족족 쓰러져버렸다. 한울의 이마에 땀 한방울이 맺혔다. 스물, 스물 하나, 스물 둘···. 쓰러진 사람의 몸 위에 또 다시 사람이 쓰러졌다. 한울의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부채를 단검처럼 휘두르는 한울을 보고, 히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한울님은 대단히 멋지고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군요.”


호국은 풀었던 상의의 끈을 도로 묶었다. 펑퍼짐한 법복의 상의 안으로 얇은 내의가 드러나자,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어깨가 아파도 한참 아플 것 같은 거대한 크기에 요원 중 몇 명은 호국에게 자연히 시선을 돌렸다가, 한울의 부채에 머릴 얻어맞았다.


“나랑 싸우다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


한울은 부채의 대로 요원들의 관절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요원들은 뼈가 부러진 듯 팔과 다리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서른 번째 요원의 이마를, 부채의 살로 찰싹 때려준 것을 마지막으로 한울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땀으로 앞머리가 조금 젖어있을 뿐, 또한 숨소리가 약간 가빠졌을 뿐, 한울은 놈들로부터 조금의 상처도 허락하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박힌건가.”


자신을 기준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쓰러져 있는 요원들을 밟고서, 한울은 호국에게 다가왔다. 한울의 물음에, 호국은 법복의 끈으로 리본을 맨 뒤,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뺨에는 붉은 핏물이···.


“괜히 신경쓰이게 하네.”


한울은 호국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잡힌 호국은 턱을 치켜들어 머릴 빼내려 했지만, 한울은 손에 힘을 좀 더 주었다.


“야야, 징그러워. 떨어져.”


호국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한울은 그저 쯧, 하고 혀를 찰 뿐. 그는 호국의 상처를 꼼꼼히 살폈다. 그 틈이었다,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네 사람을 향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한 쪽 팔이 뒤로 꺾인 요원 하나가, 한울의 등을 향해 멀쩡한 팔을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손에는 서슬퍼런 빛이 잠시 어린 것이, 단검이 들려있는 듯 했다. 요원에게 뒤를 내어준 한울은, 기척에 빠르게 몸을 틀었지만, 그만 너무 늦고 말았다.


“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요원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무장한 요원을 제압한 것은, 놀랍게도 리아였다. 단검이 한울의 어깨죽지를 찢으려는 바로 그 순간, 리아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들어, 자신의 오른손에 묶인 망치로 요원의 관자놀이를···.


리아는 흑, 흐윽 거리며 울먹이고 있었다. 몸을 바르르 떨며, 그녀는 망치를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살아 생전 누군가를 때려본 일이라곤 한번 없었는지, 리아의 두 눈은 충격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물 방울은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한울님, 괜, 괜찮으세···.”


흐느끼며 주섬주섬 말하는 리아를 보고, 한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리아가 아니었더라면, 어깨에서부터 등까지 크게 베였을 것이다. 상처의 깊이에 따라서, 어쩌면 부채를 휘두르기도 힘이 들었겠지. 리아는 망치를 묶은 손으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 제, 제가 지켜드릴 수 있어서 기, 기뻐요.”


리아는 눈물맺힌 눈으로 애써 웃어보였다. 미소짓는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지켜보던 한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리아의 손에 묶인 끈을 풀어 망치를 떼내려 했다. 리아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싫어요, 저도 한 사람 몫을···!”

“이미 충분하니까.”


한울은 리아의 어깨를 세게 감싸쥐고, 그녀가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못하게 했다. 힘으로 제압되었다기 보다, 기세에 사로잡힌 리아는 한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볼 뿐. 더 이상 뒤로 물러서거나 주춤대지 않았다. 한울은 리아의 손에 묶은 끈을 조심스레 풀어주었다. 그는 되새기듯 말을 반복했다.


“이미 충분하니까.”


리아는 한울에게 되물었다.


“저도 한울님의 몸과 마음을 지키고 싶어요.”


리아의 가냘픈 목소리에 한울은 쯧, 혀를 찼다. 끈이 풀리자, 그는 망치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무거운 쇳덩이의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한울은 중얼거리듯 낮게 속삭였다.


“그것 역시 이미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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