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09.
리아의 두 눈이 깜빡일 때마다 물먹은 별이 빛을 냈다. 손에 난 붉은 자국을, 리아는 말 없이 매만졌다. 한울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손을 스스럼없이 맞잡았다. 놀란 리아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손을 빼내지 않았다. 그는 리아의 손을 잡고 지하로 향하는 비상구 문을 열었다.
3층에서 맡았던 진득한 꽃향기가 미미하게 느껴졌다. 히나는 너클을 고쳐잡았다.
“지하 2층에, 쿠로 키츠네와 도화단원들과 사용하는 비밀스런 침실이 있어요.”
“지하 1층에는 뭐가 있지?”
“아무것도.”
히나의 말에 호국이 되물었다.
“아무것도 없다니, 히나씨. 그게 무슨 말이죠?”
“지하 2층의 침실을 숨기기 위해, 윗층은 공실로 비워뒀다고 들었습니다. 쿠로 키츠네님만을 위한 공연을 열 때 쓰는 장소이기도 하고, 그 곳에는 아무것도···.”
한울은 히나의 말을 흘려 듣지않고, 지하 1층을 그대로 지나치고, 곧바로 2층으로 향했다. 히나는 자신을 신뢰해주는 한울의 행동에,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일행보다 좀 더 앞서 걸었다. 그리고 성실한 안내자의 얼굴이 되었다.
2층의 문을 열자,
숨막힐 듯한 꽃향기가 네 사람을 꽉 움켜잡았다. 리아는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꼭 막았고, 바르게 걸으려 애썼다. 한울과 호국 역시, 옷 소매로 연기를 걸러내려 애썼다. 이미 익숙해진 듯 히나 만이 어려움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치렁치렁한 분홍색의 천을 천장에 달아놓고, 성인 네다섯명은 한꺼번에 잘 수 있을법한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가 나란히 두 개가 놓여있는 기이한 방. 벽면에는 거울이 붙어있었고, 방의 한 쪽에는 이상한 모양의 의자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채찍과 로프, 개구기 등 일상 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들이 도처에 널부러져 있었다.
“정말 기분나쁜 방이네.”
호국은 참지않고 노골적으로 헛구역질을 해댔다. 리아는 여지껏 깨닫지 못했던 믿음의 이면에, 놀란 듯 어깨를 떨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무엇을 추종해 왔는지, 그 일그러진 형체를 고스란히 마주하는 일. 리아는 쉽지않은 경험에 자신의 심장깨를 말없이 다독였다. 갑갑한 통증이 견디기 어려웠던 터다.
지하 2층은 커다란 광장같은 느낌이었다. 두 건물이 이어져있는 공간인데다가 막힘없이 크게 뚫려있는 구조라 더욱 넓게 느껴졌다. 한울은 침대 쪽은 살펴보지도 않고, 곧바로 옆 건물로 향했다. 21층에 위치한 쿠로 키츠네의 방까지 단박에 올라가려는 듯. 그렇게 맡은 바 임무를 빨리 끝내려는 듯.
옆 건물의 1층, 로비로 올라간 네 사람은, 일순간 말이 없어졌다. 그들을 막아선 것은 검은 마스크를 쓴 괴한의 무리. 쇠로 된 야구배트를 든 사람도 있었고, 히나처럼 너클을 낀 사내도 몇몇 있었다. 감춰지지 않는 문신이 그들을 더욱 험악하게 보이게 했다. 그들은 아무리 살펴도, 정규 훈련을 받은 안전요원 쯤으로 보이지 않았다.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꼭 성난 미한리의 주민들 같아 보이기도 했고, 그냥 어딘가의 잔악한 폭력배들처럼도 보였다.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숨기지 않자, 한울은 즉시 부채의 살을 펼쳤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호국도 한울과 등을 맞대고 나섰다는 것. 그녀는 가슴을 더듬거려 품 안쪽에서 노란 부적을 몇 장 꺼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부적을 끼워 흔들었다. 한울과 호국이 싸울 태세를 취하자 괴한들은 기척없이 떼지어 덤벼들었다.
호국은 달려드는 깡패 무리에게 부적을 던졌다, 그러자 부적에는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허공에 날아오른 불덩어리를, 한울은 부채로 세게 날려보냈다. 얼굴에 불이 끼얹어진 괴한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호국은 멈추지 않고, 부적을 사방으로 띄어 올렸고, 거센 불로 뒤바뀐 부적을 한울은 빠른 속도로 날려보냈다. 거대한 불꽃들이 화살 또는 총탄처럼 사방에 쏘아졌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한 몸처럼 이뤄지는 두 사람의 협공에 괴한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리아는 뒷 쪽에서 귀를 틀어막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겁먹은 리아에게 덤벼드는 괴한은, 히나가 나서서 처단했다. 그녀는 작은 키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이 날아올라 너클 낀 주먹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히나는 적은 힘으로 큰 충격을 주기 위해 적들의 눈 만을 노렸다. 안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괴한들은 얼굴을 감싸쥐고 고꾸라졌다. 너클의 뾰족한 돌기는 흡사 가시같이, 매섭게 날이 서 있었다. 히나는 상대의 눈을 꿰뚫는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튀어오르거나 날아다니는 불꽃은 집기에도 달라붙었다. 불구덩이 속에서 괴한들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자, 한울은 부채를 세로로 세워 흔들었다. 부채는 흔들릴 때마다 커다란 바람을 불러들였다. 공기의 흐름이 파도처럼 거세지자 불길은 점점 커졌다.
건물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지옥같은 풍경에 괴한들은 로비 문을 열고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한울과 호국을 두고 귀신들린 자, 또는 괴물, 악마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더욱 무서웠으리라. 그슬린 머리카락으로, 볼썽사납게 일그러진 화상자국으로 그들은 미한리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괴한들이 한 명 남기지 않고 꽁무니를 빼자, 한울과 호국은 등을 맞대고 서 있던 것을 그만 두고, 스트레칭을 했다. 한울은 어깨를 두어번 돌린 후에, 부채의 살을 전부 펴서 큼지막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한울이 위, 아래로 부채를 넓게 부치자 건물을 좀먹던 불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매캐한 연기만이 피어오르자, 한울은 부채를 도로 접어 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1층 쿠로 키츠네의 방으로 한번에 올라갈까?”
한울의 아이디어에, 호국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본 뒤 고개를 저었다.
“작동하지 않아. 처음 계획처럼 걸어가야겠는데···.”
“리아야, 21층까지 걸어올라갈 수 있겠어?”
한울의 물음에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디든지요. 얼마든지요.”
리아는 거뜬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나는 2층 행정실에 있는 스즈키씨와 만나면, 미한리를 떠날거에요.”
히나는 너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명확하고 또 단호했다.
“자금 흐름을 유추할 수 있는 회계 자료와 성 상납 등 종교내 내부 정황은 이미 충분히 캤으니까. 전에 말했던 흑호교의 비밀 문건도 꼭 공유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네 사람은 지상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2층은 복도에서부터 유리로 된 자동문으로 가로막혀 있었기에, 한울은 강한 발길질 몇 번으로 문을 전부 부숴버렸다. 어설피 깨진 조각에, 일행이 종아리를 베일까 걱정되었던지, 한울은 유리를 남김없이 밟아 깨뜨렸다. 자근자근 유리가 조각나는 동안, 히나는 자신이 끼고 있던 너클을 리아에게 건냈다.
“무서워하지 말고, 거침없이 때려버리는 거에요.”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한울님을 지키고 싶다면서요. 지키려면 해야지.”
“아···.”
리아는 크게 결심했다는 듯 너클을 받아서, 양 손에 끼었다.
“생각보다 무겁군요.”
리아는 숨을 꼴깍 삼켰다. 한울은 뒤에서 소근대는 세 사람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유리문의 유리 조각을 전부 박살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는 거였다. 히나는 유리조각을 조심조심 밟으며 행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사무실 안은 전등마저 모조리 꺼져있었다.
“사토씨.”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컴퓨터 책상 너머로 들렸다. 히나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안경을 쓴 남성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한울과 히나, 그리고 호국과 리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들이 아까 이야기했던···.”
“네, 스즈키씨. 한국의 VIP로부터 쿠로 키츠네의 처단을 부탁받았다는 퇴마사 일행.”
“무엇으로 이들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스즈키는 안경을 고쳐쓰며 한울을 노려보았다. 히나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행정실까지 흑호교 신도들을 격파하며 찾아온 것이 신뢰할 수 있는 증거 아닐까요.”
“우문 현답 같긴 하군요.”
“아까 싸움을 보셨어야 해요, 기묘한 불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등···.”
히나의 말에 스즈키는 자세를 바로 하고, 한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일본의 V 신문사 정치부 기자, 스즈키 토모야鈴木 智也입니다.”
토모야는 작은 USB를 들어보였다.
“흑호교 내부의 자금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회계 장부를 얻기 위해 회계직으로 잠입했습니다. 사토 히나씨께 들어서 아시겠지만, 사토씨는 도화단원으로 잠입해 고생하셨지요.”
“고생이랄 게 있을까요. 사회 정의구현을 위한 일인데···.”
히나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한울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정의로운 게 누구인지 모르겠네.”
스즈키는 한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열혈이기도 하죠, 부정한 정치자금이 한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직접 흑호교 본당에 잠입할 계획을 세운 것도 사토씨였습니다.”
“그랬군, 전부 히나씨의 계획이었군···.”
“히나씨요?”
히나의 이름을 스스럼 없이 부르는 한울에게 놀란 스즈키는, 눈을 크게 떴다. 히나는 이제와서 신경쓸 문제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왜?”
한울이 되묻자 스즈키는 즉답했다.
“일본인은 연인 또는 부부 사이에서나 이름을 부릅니다.”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문화의 차이로군.”
한울의 솔직한 말에 히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나아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커튼의 원단을 손으로 매만져 살펴보았다.
“스즈키씨, 창문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요?”
“왜 굳이 창문으로 내려갑니까. 계단을 이용하죠.”
“흑호교 일당이 로비에 아직 남아있거나 돌아온다면 어떻게 싸울 생각이에요.”
히나는 커튼들을 뜯어 그 끝을 길게 이었다. 그녀는 건물의 높이를 대략적으로 가늠하며, 커튼을 계속해서 묶었다. 길어져가는 커튼만큼 히나의 말도 길게 이어졌다.
“여기 행정실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한울님 덕분이었고, 우리 둘이 이 건물 밖을 나가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루트로는 불가능할 거에요.”
히나가 커튼으로 길다란 끈을 만드는 동안, 스즈키는 책상에서 다른 USB를 꺼냈다. 그리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자료를 옮겨주려는 듯, 그는 안경을 고쳐쓰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한울씨. 어렵게 얻은 회계 장부의 파일을 넘겨줄테니, 이후 흑호교의 비밀 문건을 얻게되면 우리에게도 꼭 공유해줘요. 회사내 개인 메일주소도 워드로 남겨둘테니까.”
“좋아.”
스즈키는 한울에게 USB를 건내주었다. 히나가 창 밖으로 커튼 두름을 던지는 모습을 본 스즈키는 곧 그녀를 따라 창가에 발을 걸치고 섰다. 창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고작 2층이라지만 체감하기에 높이는 꽤나 높아보였다. 하지만 히나는 겁이라곤 하나도 나지 않는 듯, 커튼을 잡고서 건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람이 불어와 히나의 머리카락이 예쁘게 날렸다. 히나는 한울과 마주보고서 생긋 웃었다.
“한울님. 요사스러운 검은 여우와의 싸움에서, 무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