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곡식이 익어가고 들녘에 칼바람이 불어오면, 여느 때 보다 더 아궁이에 봄을 지피고 이른 아침을 연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1남 4녀 가정에 장녀로 태어나 20대 중반에 둘째 며느리로 시집오셨다. 시부모님과 시누이와 시조카들까지 모여 사는 대가족이었 다.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첫아들을 낳았지만
홍역으로 잃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 렸고 살갗 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가슴에 묻고 살
았다. 그 가운데 딸만 내리 셋을 낳고 아들을 못난다고 구박을 받다가 늦게나마 아들을 낳 아서 며느리로서 어떤 사명을 다한 것 같았 고, 시댁으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시골생활이지만 논, 밭이 많아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지 만, 아버지 가 39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간병을 다했지만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세상을 자식 들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한을 가슴에 안에 사셨을까...
어머니는 거칠고 어려운 세상에 힘찬 여전사가
되시어, 바쁜 농촌일손에 힘겨움을 이기면서,
자식들에게는 따스한 혼으로 건강한 사회인으 로 성장시켜 주신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팔순인 나이에 고단한 삶의 주름
살에도 남동생 가족과 함께 건강한 삶을 지내 시 고 있다.
어머니는 팥칼국수를 자주 해 주셨다.
자식들이 객지생활을 하다가 어머니에게 가면
가마솥에 장작불로 팥이 톡톡 터질 때까지 삶아
체에 걸러 놓고, 대청마루에서 홍두깨로 밀어
만든 팥 칼국수를 끓여 주셨다.
어머니는 가끔 팥 칼국수를 만들어 먹으면서
"네 아버지도 팥 칼국수를 참 좋아하셨단다.
오늘도 함께 먹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 말끝
을 흐리곤 하신다. 지금도 찬바람이 불고 한가
한 때면 동네 어르신들이 어머니의 팥 칼국수 맛을 찾아 집에 오시곤 한다. 나이 든 삶 속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손맛으로 아들딸 손주들에게 또는 동네 분들에게 별미 팥 칼국수를 만들어 주시며 행복해하신 웃음과 건강한 생활이 자랑
스럽기까지 한다.
세월 속에 장사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머니도
팔순이 넘으셨다.
어머니는 오 남매를 성장시키면서 수많은 아픔 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고개를 들고 앞에 펼 쳐진 길을 올곧게 해쳐 나오셨다.
지금도 어머니의 소원은 "아들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게 살다가 내 아버지 곁으로 떠난 것"이라며 건강을 챙기고 즐겁게 보내고 계신 다. 농촌도 많은 변화로 기계화가 되었고 마을에
보건소가 있어 정기적으로 치매, 요가, 운동프로
그램에서 여가 시간을 즐기고 계신다. 동네의 축 제 모임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하시는 어머니 를 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특히 어머니는 '허공' '단발머리' 등의 조용필 노래를 좋아해 카세트 도 사드렸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씀하신다.
인생초기에는 흙빛처럼 캄캄하고 어러웠던 일도 많았지만, 이제는 웃으며 즐거운 노후 삶을 살고 계신다. 그렇지만 나는 자식으로서 어머니에게 좀 더 늙으시기 전에 ,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한 자책이 아려온다.
어머니의 주름살은 더욱 선명해지고 깊어져간 세월이다.
세월이 가도 어머니의 사랑과 칼국수 손맛은 변
함이 없다. 나도 나이 들어 한 가정의 주부이고
어머니가 되어 보니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알겠 다"는 철 늦은 깨달음이다.
어머니의 남모르는 깊은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다도 짙은 진실이고, 변함없는 영원의 혼" 이란
것을 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