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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로마 시대와 유대인 박해

1. 경제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로마제국의 멸망.

by 김병훈

1. 二次 離散 이후, 후기 로마 시대와 유대인


유대-로마 전쟁에서 패한 후 유대인은 정착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로마제국은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과 밀라노 칙령을 계기로 기독교 국가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그동안 로마제국이 왜 기독교를 박해했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박해는 필연적으로 로마제국 경제의 쇠락을 가져왔습니다. 이 시기 상업 및 교역은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유대인이 추방된 후 저질 화폐의 유통으로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화폐의 불신이 시장 기능의 마비를 불러와 500년 만에 다시 물물교환 경제가 출현한 것입니다. 만약 로마제국이 유대인을 추방시키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 체제 안으로 흡수해 활용했다면 로마제국이 경제적 문제로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1) 디아스포라 -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서기 66~73년의 유대-로마전쟁 직전의 전 세계 유대인 인구는 대략 80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그 가운데 파르티아왕국(바빌론)에 100만, 팔레스타인에 240만, 나머지 460만 명은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대개 이집트, 소아시아와 시리아 등에 살았습니다. 그 무렵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 많은 유대인 공동체 디아스포라가 생겼습니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제국 3대 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어서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사용했습니다. 주로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했기에 무역을 중시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원주민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반도 전역에 40개의 유대인 정착지가 있었다고 하니 웬만한 도시마다 유대인 커뮤니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2차 이산 이후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방에 흩어진 종족들을 보존시키고, 더 나아가 종교적 동일성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 시킬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그들은 디아스포라 공동체 수칙과 커뮤니티조직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고, 모든 유대인 공동체는 이것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수칙에는 일곱 개의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원전부터 만들어져 전해진 이 수칙의 주요 요점은 ‘모든 유대인들은 그의 형제들을 지키는 보호자이고 유대인은 모두 한 형제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 고유의 공동체 의식이 유대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이 원칙들은 시대에 따른 개혁을 거쳐 오늘날까지 굳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다.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자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들이 로마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285년 왕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광대한 로마제국에 황제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다툼이 계속된다고 보고, 제국을 동서로 나누었고, 다시 각각의 제국에 부황제를 두어 통치 구역을 4등분하여. 293년 이후 로마제국에는 4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됩니다.

기독교를 믿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국력을 통일시키기 위해 다른 황제들을 하나씩 제거했습니다.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제국 내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기독교 탄압에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그간 숨어 지냈던 기독교도들한테는 무한한 기쁨이었으나, 예수를 박해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3) 기독교, 반유대인 정책 선동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뒤, 세 아들이 로마제국을 삼분했습니다. 351년 셋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단독 황제가 됩니다. 그는 유대인의 기독교 노예 소유 금지령을 이교도 노예로까지 확장했고, 유대인과 기독교도 사이의 혼인도 금했습니다. 이런 혼인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392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하였고, 유대인은 예수를 죽게 만든 하늘의 죄인이자 기독교의 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농업 대신 가족 구성원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소영농이나 자영업을 찾아야 했고, 군인으로 참가할 수 없었으며, 정부 관직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되었습니다.


(4) 로마제국의 분열.


로마는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 395년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습니다. 서로마제국에서는 라틴계가 우세했고 동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계가 우세했습니다. 동로마제국은 많은 인구, 유능한 황제, 풍부한 재정, 우수한 군사력 덕분에 3~4세기의 대격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서로마제국은 476년 막을 내렸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서양의 고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5) 경제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로마제국의 멸망.


고대에는 농업과 전쟁을 통해 부국강병책을 도모했습니다. 노예 확보를 위한 전쟁이 매우 중요한 국가사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심각한 경제 문제는 노예경제와 인력 부족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실 로마 문명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도시들은 대체로 노예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태평성대에는 정복 전쟁이 없어 노예 인력을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는 극심한 인력난에 빠졌고 경제 문제를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이의 영향으로 대토지 소유제를 기반으로 한 농업 생산 체제가 쇠퇴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노예를 해방시켜 그들에게 토지를 대여해 수확의 일부를 지주에게 상납하게 하는 소작농제도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노예제도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생산 인력이 줄어들었는데도 북방 야만인들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병력은 계속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2~3세기에는 전염병이 창궐함으로써 인구가 격감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의 인구는 약 3분의 1가량 줄어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노동력도 모자라고 병력 또한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패배라곤 모르던 로마의 군대가 번번이 패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몰락은 현대인에게도 몇 가지 교훈을 알려줍니다.

첫째, 부의 원천이 오로지 농업에 있다며 상업을 경시해 시장경제를 무시한 점입니다.

둘째,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입니다. 화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실물 선호도를 높임으로써 통화경제가 몰락했습니다. 거대한 제국도 순식간에 파산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 어떤 국가나 정부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치도 성립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로마제국 몰락 이후 한동안 무정부 상태의 암흑세계에서 지낸 중세의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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