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유대인의 저항.
3. 유대인 저항과 2000년 방랑의 시작
(1) 유대-로마 전쟁 그 후, 유대인의 생활.
서기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를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로 가서,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고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습니다. 그는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만이 회복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하난은 <토라>를 가르쳐 매년 소수의 랍비를 길러내 유럽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세우고 예배를 드림며 유대인들에게 <토라>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패망한 유대인들의 구심점이 됩니다. 유대인에게 교육은 곧 신앙입니다.
랍비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수업방식은 질문과 토론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였기 때문에 당시 랍비들은 따로 생계 수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종교적으로 주어진 권위가 아니라 학문과 가르침 혹은 탁월한 도덕성을 통해 자율적으로 생긴 권위입니다. 랍비를 길러내는 율법학교인 예시바에서는 1학년을 ‘賢者’, 2학년을 ‘哲學者’, 3학년을 ‘學生’이라고 불렀습니다. 겸허한 자세로 배우는 자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학생이 되려면 수년 동안 수업을 쌓아야 한다는 발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갈라서다.
원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예배를 같이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뿌리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85년경 야브네에서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12조 기도문에 나사렛 사람들 곧 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교 회당에 더 이상 참석할 수 없어 이때부터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습니다.
(3)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유대인의 저항.
로마군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유대인의 봉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헤로디움, 마사다, 마케루스, 이들 세 곳의 요새가 아직도 유대인 반군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티투스 황제는 뚜 곳의 요새는 함락하였으나, 마사다는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1,000명도 안 되는 이들을 함락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서기 72년 실바 장군이 이끄는 병력 15,000명이 마사다로 진군하였습니다. 마사다의 유대인들은 놀랍게도 2년이나 버텼습니다. 마사다 항전은 유대 민중들의 처절한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실바 장군은 6,000명의 유대인 노예들에게 인공 능선을 쌓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요새의 함락이 목전에 달하자, 유대인들은 자살을 금지하는 율법에 따라 각자 가족들을 죽이고 남자 열 명 가운데 한 명을 뽑아 나머지를 죽이고 마지막 한 명이 자결하는 의식을 치룹니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식을 거행하고, 유대의 젊은이라면 정신 무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찾아가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곳입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강제로 흩어졌지만, 그들은 언어와 율법을 민족의 정체성으로 삼고 2000년을 버티면서 결국 독립을 이루어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그때를 잊지 않으려 마사다를 찾아 준비해 온 병에 흙을 담아간다고 합니다. 유대 민족의 단결력은 마사다 정신이요, 그 정신은 흙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사다 전투 후 로마는 예루살렘을 더욱 철저히 응징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유대교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서 반란을 가장 많이 일으킨 민족은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한번 저항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기 때문에 로마군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4) 바르 코크바 반란, 2차 유대-로마 전쟁.
130년 유대 지방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두 가지 정책이 유대인의 분노를 샀습니다.
하나는 식민도시를 예루살렘 바로 북쪽에 건설해 그의 10군단을 상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할례를 금지 시킨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로마의 神 주피터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은 132~135년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킵니다. 바르 코크바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유대인의 반란은 현지에 주둔한 로마군단을 전멸시킬 만큼 거셌습니다. 이 반란은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세베루스 장군은 35,000명의 대규모의 로마군단과 지원부대를 이끌고 바르 코크바의 군대와 싸웠습니다. 그는 전면전 대신, 반군의 수많은 거점들을 포위해 그들이 굶주려서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리는 전술을 택했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희생이 적은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135년 로마군의 승리로 바르 코크바의 반란은 끝이 납니다. 바르 코크바는 전사했으며 당시 지식인을 비롯한 추종자들은 모두 처형됐습니다. 로마 황제는 ‘유대’라는 민족의 이름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로마제국의 노예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5) 2차 이산(離散), 2000년에 걸친 방랑의 시작.
이 일련의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240만 국민 중에 66~70년 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110만 명이 죽었으며, 132~135년 2차 전쟁 때 58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습니다. 로마제국과의 전쟁으로 국민의 3분의 2 이상이 죽은 셈입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잡혀 가거나 나라를 등지고 방랑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2천 년에 걸친 본격적인 유랑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주로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이를 ‘제2차 이산’이라 불립니다.
당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인식일 준수금지, <토라> 연구금지, 할례 금지라는 세 가지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 금지령을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의 이름을 유대인들에게는 저주스런 이름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습니다.
국가 성립의 3대 기본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135년 유대인들은 영토와 국민, 주권 모두를 잃게 됩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어떤 민족도 버텨내기 힘듭니다.
세계사에는 그렇게 사라져 간 민족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고, 지금까지도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뒤 이 지역은 주로 아랍인에 의해 통치되어 왔습니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해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 왔습니다. 그 뒤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슬람이 지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의 神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성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