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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 로마 전쟁과 예루살렘의 점령

2. 1차 유대-로마 전쟁과 예루살렘의 점령

by 김병훈

2. 1차 유대-로마 전쟁과 예루살렘의 점령


초기의 로마제국은 점령지의 문화적·경제적 자치 통치를 허락했습니다. 이는 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밖의 상업도시에서 경쟁 관계였던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반유대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더해 헤롯 왕이 죽은 뒤 로마제국이 직접통치를 시작하자 유대인 특유의 배타적인 유일 신앙 때문에 로마에 동화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고자 로마군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1차, 2차에 걸친 유대-로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고 이후 유대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2000년에 걸친 방랑의 세월을 시작합니다.


(1)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갈등.


헤롯 왕이 죽고 얼마 지난 뒤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 민족에 의한 자치통치에서 로마제국의 직접통치로 바뀌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외세에 의한 직접 통치는 유대 민족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 밖의 상업도시에서도 경쟁 관계에 있었던 유대인과 그리스인들 사이의 갈등이 커져갔습니다. 복합인종으로 구성된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은 별종으로 보였습니다. 그리스 사회는 자신의 문화를 표준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절합니다. 그로부터 최초의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38년 스스로를 神이라고 선언했던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를 유대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스인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을 모함할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집트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항구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황제를 핑계 삼아 폭동을 일으킵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유대인의 배를 불태우고, 유대인 거주지역도 방화와 약탈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종교적으로 다신교를 믿었고, 문화적으로 ‘세계는 하나다’라는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는 헬레니즘 문화인 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에 선민사상에 근거한 차별성을 갖는 문화이다 보니 곳곳에서 부딪혔습니다. 치안을 맡은 로마 군인들은 심정적으로 그리스인들 편에 서서 폭동을 방관합니다. 그 뒤에도 계속되는 유대인과 그리스·로마인 간의 갈등은 반란의 도화선이 됩니다.


(2) 유대인 폭동의 시작, 1차 유대-로마 전쟁.


66년 여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 수비대 병사들이 참살된 뒤, 시리아 주재 로마군들이 도착했으나 유대인의 거센 저항에 놀라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선 유대인들에 대한 보복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특유의 신앙적 가치를 고집한 유대인들은 그에 따른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이 전멸하자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먼저 해안지대를 제압하고 연락망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외곽 성채의 대부분을 공략해 먼저 지방을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68년 네로의 자살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69년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티투스를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떠났습니다.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유월절 기간에 여러 당파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의 자치를 바라는 정치세력인 열심당(Zealots)의 당원들과 투쟁적 성향이 덜한 온건파의 싸움으로 예루살렘의 거리는 피로 가득 찼습니다. 결국 열심당원이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내분은 계속되었고, 70년 이른 봄 로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모든 당파들은 힘을 합쳐 성을 방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항복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3) 티투스,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예루살렘 탈환 작전을 펼치는 로마군은 월등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치열하게 계속되어 70년 4월부터 9월까지 이어졌습니다. 티투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가혹하게 진압하면서도 부하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함락된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무차별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뒤 로마는 이 전쟁을 기념하며 특별 화폐를 주조하고, 개선문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제국의 전역으로 퍼져 나가 離散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로마제국은 승자의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살며 유대교를 믿을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 일부는 이베리아반도 등으로 이주해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티투스 장군이 남아 있는 유대인들과 후대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려고 교훈적으로 남겨둔 것이 바로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입니다. 이 통곡의 벽은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 중 하나입니다. 통곡의 벽 돌 틈에는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뿐 아니라 순례객들도 소원이 적힌 쪽지를 돌 틈새에 끼워 두고 기도합니다.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은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4) 노예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건설한 콜로세움.


전쟁의 참상은 처절하고도 비참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 240만 명 가운데 110만 명이 칼과 불에 살육당하거나 기근으로 굶어 죽었습니다. 로마인은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지만, 저항하는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실행했습니다. 이때 잡혀간 유대인 노예들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인 72년부터 8년간 투입되어 티투스 황제 때 완성한 것이 그 유명한 콜로세움입니다.

콜로세움은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입니다.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나 단조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아치 양쪽에 원기둥을 세우고 아치 모양의 공간에는 입상을 세우는 형태가 연속되어 있는데, 1층에 사용된 기둥은 중후한 도리아식, 2층의 기둥은 산뜻한 이오니아식, 3층의 기둥은 섬세한 코린트식으로 층마다 기둥 양식을 바꾸어 단조로움을 없앴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가 보는 콜로세움은 로마제국시대 규모의 3분의 1에 불과합니다.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뒤 로마의 공공 건축물은 석재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콜로세움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떼어서 가져가 버렸습니다. 아치마다 놓여 있던 수많은 입상들도, 벽면을 덮고 있던 대리석 판들도 모두 제거한 뒤에 남은 ‘뼈대’가 오늘날의 콜로세움입니다. 콜로세움은 유대 전쟁포로들의 한이 서려 있는 건축물입니다.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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