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다.
1. 로마의 득세와 유대인 그리고 예수의 등장
로마의 패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점령지라도 자치권과 문화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대인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카이사르 이래 로마 왕국은 유대인의 유일사상, 자치법, 율법 등을 인정했습니다. 그 덕분에 유대인은 해외와 유대인 공동체를 여기저기 설립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문 건 로마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왜 예수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1)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의 특징
로마가 팽창을 거듭하던 기원전 3~1세기에 많은 포로들이 노예로 잡혀왔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때 무려 100만 명의 노예를 얻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거의 모든 부문에서 노예가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널리 쓰인 분야는 농업이었습니다. 농장은 대개 자유민과 노예가 섞여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 노예제도의 큰 특징은 직능 분화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진척됐다는 것입니다.
배(船)를 관리하는 노예 선장 밑에서 자유민들이 노를 젓는 일이 가능했고, 황실 노예는 오늘날 장관 혹은 수석 비서관에 해당하는 직위의 일을 했습니다. 교사, 의사, 약사 중에 노예 혹은 해방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관리인 역할을 하는 노예들은 주인 대신 가게나 공방, 선박을 운영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업 이윤을 주인과 나누어 가졌으며, 거상으로 성장한 사람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기도 하였습니다. 사회 각 분야마다 다양한 노예들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2) 로마의 속국이 된 유다 왕국.
그 무렵 유다 왕국의 하스모니안 왕조는 로마에 대항하기보다는 로마의 보호를 받으면서 번영을 구가하는 편이 전쟁에 휩싸이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63년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화평을 요청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로마의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지중해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던 페니키아, 그리스, 유다 왕국은 모두 차례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로마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바로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접수한 때부터 시작되어 7세기에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까지 약 70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3)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카이사르.
로마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카이사르는 유다이아 주로 편입된 유다 왕국을 속주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동맹관계 곧 로마의 우방국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이사르는 政敎一致를 특징으로 하는 유대 민족의 특수한 사정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관용과 특전을 베풀었습니다. 유대인 최고 제사장에게 유다 최고위 자리를 돌려주어 통치권을 돌려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도 허락했습니다. 로마가 제패한 뒤 몰수한 유다의 주요 항구 야파를 반환함으로써 해상권도 돌려주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종교적 관용도 베풀어서 유대교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스인과 경쟁 관계에 있는 유대인에게 경제적으로 동등한 권리도 주었습니다.
(4) 해외 유대인 공동체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생활.
유다의 왕 헤롯은 경제에 공을 들였습니다. 통상로를 이용하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었고, 사해에서 배의 건조에 필요한 아스팔트를 추출해 이집트와 배분해 독점했고, 구리 광산 등 광대한 지역에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와 반반씩 갈라서 가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하여 ‘헤롯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헤롯 왕은 로마를 비롯한 해외의 이산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중요한 장군 아그리파와 절친하게 지내면서, 로마제국 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공동체를 두텁게 보호하도록 하였습니다. 헤롯 왕 시절, 유대인 커뮤니티는 여기저기에 설립된 작은 복지국가라고 간주할 정도로 유명하였습니다.
(5) 예수,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다.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외국 지배에 시달려온 유대인들은 민족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신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이고,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성장한 예수는 서기 27년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느님의 축복은 유대인에게만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뒤집었습니다. 그가 말한 복음은 유대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병들든 건강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신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는 모두 ‘상선벌악(賞善罰惡)’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도 뒤집었습니다. 죄지은 사람도 하느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정의가 아니라 신의 은총이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는 율법과 할례로 유대인만 선택받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를 통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느님과 직접 계약을 맺었는지의 여부입니다. 바로 그 증거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문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이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닌 모든 인류의 하느님이 되었다고 기독교에서는 평가합니다. 예수는 계층 간 장벽도 허물었습니다. 병자와 장애인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응답은 <토라(구약성서, 모세율법)>에 대한 복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깊은 인간에 대해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토라>를 배제하면서, 다가올 최후의 심판 때 구제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토라>를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교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박해했습니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행동이 훗날 후손들에게 얼마나 지난한 고통의 역사를 가져다줄지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러한 예수에 대해 유대교는 <탈무드>에서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했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의 아들,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지체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를 ‘이샤’라고 부르는 이슬람도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외아들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살과 기적을 행한 사실을 믿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예수를 유대 민족을 인도하기 위해 신이 보낸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