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두 왕국의 분열과 외부의 침입에 의한 멸망.
5. 솔로몬 이후, 왕국의 분열과 멸망
기원전 926년, 40년을 통치했던 솔로몬 왕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북쪽의 부족들이 ‘지도자란 국민의 심복이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들며 강제노동과 세금을 줄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거절하자, 그들은 그들만의 모임을 갖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에게 부역정책에 대해 반대하며 항거하다가 이집트로 도피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다윗 왕조를 섬기는 사람들은 유다 지파뿐이었습니다. 결국 이듬해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갈라집니다.
북쪽은 10개 지파가 독립해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세운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고,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로 구성되어 르호보암이 이끄는 ‘유다 왕국’이 되었습니다.
(1) 두 형제국 간의 전쟁의 시작.
이스라엘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바알 신을 상징하는 황금 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어 놓고 예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종교적 관점에서 명백한 우상숭배였으며,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입니다. 르호보암 왕의 뒤를 이은 유다 왕국의 아비아 왕은 약 40만의 군대로 북 이스라엘 왕국의 80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유다 왕국의 아사 왕은 이집트와 전쟁을 치루면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어 필리스티아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아사 왕 3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바아사 왕은 요충지인 벤자민 지파의 땅 ‘라마’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아사 왕은 아람의 다메셋 왕에게 금은을 보내며 원병을 요청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였고, 결국 바아사 왕은 철수하였습니다. 이는 아람이 이스라엘을 수시로 괴롭히는 계기가 되었으며, 3천년이 지난 지금도 아람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딩시 이스라엘이나 유다 모두 군사 강국이었고, 2세기 동안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2) 이스라엘 왕국, 아시리아 제국을 격파하다.
이스라엘 왕국은 동쪽의 아시리아가 커지자 위협을 느껴 서쪽 나라들과는 화평정책을 취하면서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서쪽으로 계속 팽창하면서 이집트를 최종 목표로 하였습니다. 길목에 위치한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자, 이스라엘은 차라리 싸우기로 하였습니다.
기원전 854년, 아시리이와 이스라엘은 일전을 치루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리엘이 의외로 승리 하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복 계획은 100년 뒤로 후퇴했습니다.
(3) 아시리아의 재침공과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아수르’로 불리는 아시리아는 노아의 손자이자 셈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아수르가 조상입니다.
아시리아인들은 말(馬)들을 교배해 군마를 만들었고 안장을 발명해 기원전 1000년경에 군사들이 직접 말을 타고 전투하는 막강한 기병대를 선보였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 탄생하면서 전장에서 훨씬 기동성이 좋아지고 타격력이 높아졌습니다. 당시로선 최강, 최신의 전차부대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런 아시리아의 기병대를 당해낼 세력이 없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대군을 동원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왕국이 무조건 항복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은 무려 10년을 끌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존속 기간은 불과 209년이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역사 속에 사라졌습니다. 아시리아는 멸망한 이스라엘 지역에 아시리아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피가 섞이도록 혼혈정책을 쓰면서, 혼혈이면서 잡종이라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게 됩니다.
유대교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여 가혹한 형벌로 마무리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 유다 왕국의 멸망.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망한 후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습니다. 유다 왕국은 북쪽 시리아 및 남쪽 이집트와 연합했습니다. 기원전 701년 전쟁이 시작되자 아시리아 대군에 밀린 시리아와 이집트는 굴복하였고, 유다 왕국은 대제국 이시리아와 홀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서(혹은 발진티푸스 발병으로) 18만 5천 명이 급사하여 유다 왕국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아시리아는 유다 왕국을 범접치 못하다가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합니다.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의 기세에 놀란 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침략의 명분을 주어 기원전 601년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이민족(바빌로니아)에게 지배당하자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뼈저리게 뉘우쳤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게 된 기회가 됩니다. 이교도들의 우상숭배가 강요될수록 나름대로 하느님을 따르고자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였습니다.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 지배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원전 600년에 유대인들의 첫 반란이 있었습니다. 이때 반란을 진압하려 파병된 군대가 오히려 전멸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연합군을 진두지휘해 다시 공격했고, 결국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 유다 왕국을 완전히 병합하지 않고 허수아비 왕을 앉혀 놓고 속국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새롭게 즉위한 유다왕이 예상 외로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집트와 동맹해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느부갓네살 왕은 2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집트는 몇 주일 만에 항복했지만 유대인은 1년 6개월을 싸웠으나, 성벽을 격파했고 유다 왕국은 다시 회복이 불가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문화와 사상에 있어서 타 민족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다고 여겼기에 자기들보다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현실이 참기 어려웠습니다. 바빌로니아에 대한 반란은 실패해 기원전 582년 유다 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전쟁의 참화로 예루살렘 성전은 말 그대로 초토화했습니다. 이때 언약궤에 안치되어 있던 모세의 십계명 석판마저 없어졌습니다. 유다 국토 전체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상류층은 모조리 바빌로니아로 잡혀갔습니다. 바빌로니아에 잡혀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성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간 왕래가 잦았던 이집트로 주로 피신했습니다.
이때 지중해 권역의 페니키아 식민지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시 방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를 유대인들의 ‘1차 이산(離散)’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1948년 건국까지 약 2,500년간을 ‘유대인 방랑시대’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