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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시대,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

4. 지혜의 왕 - 솔로몬의 업적들.

by 김병훈

4.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


기원전 970년경 솔로몬이 치열한 왕위쟁탈전 끝에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세 번째 왕이 된 그의 나이는 21세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왕국의 틀이 잡히자 제일 먼저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솔로몬 왕은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몰라 하느님께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했다고 합니다. 이때 하느님이 그의 청원을 칭찬하여 지혜와 부귀영화, 명예까지 허락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유대인들이 솔로몬 왕을 지혜의 왕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1) 비탈진 언덕을 활용해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심다.


솔로몬 왕은 고원의 비옥한 곡창지대에는 국제교역에서 현금 노릇을 하는 을, 비탈진 언덕에는 과수원과 포도원을 만들어 올리브포도를 집중적으로 심게 했습니다. 지세(地勢)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농어정책이었습니다. 올리브와 포도는 강우량이 적은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깊게 내려 살아가는 생명력이 강한 식물입니다. 특히 올리브나무는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감람나무영광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기쁨과 평화를 나타냅니다. 올리브 열매를 첫 번째 짠 기름은 성전에 바치는 기름 중 가장 거룩한 기름이었습니다.


(2) 예루살렘 성전 건축으로 전성기 기반을 다지다.


솔로몬 왕은 즉위 4년 2월에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시작해 7년 후에 준공하였습니다. 신전 벽은 석재였고 지붕은 페니키아산 백향목이었습니다. 금과 은, 구리 장식이 많이 들어갔고 십계명 석판 두 개를 안치한 ‘언약궤’가 마련되어 유대인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3대 축제인 유월절, 수확절, 추수절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13년 동안 건축한 솔로몬의 궁전도 주변 모든 국가의 군왕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예루살렘을 국가적, 종교적으로 왕국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다윗 왕의 계획을 솔로몬 왕이 확대해서 진행한 셈입니다.

20년에 걸친 솔로몬 왕의 건축 공사는 막대한 노동력이 요구되었습니다. 병역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강제 노역제도를 도입하고,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왕국의 북부에 이를 적용하여, 옛 가나안 토착민의 자손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함으로써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동원된 가나안 역군들의 수는 15만 명이 넘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이 많이 사는 남쪽 유다에서는 강제 노역이 면제되었습니다. 나라에 봉사하는 형태로서의 강제 노역은 병역에 비해 명예롭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훨씬 힘들었으므로 노역에 참여하는 비이스라엘인들의 원망은 차츰 더 깊어져 갔습니다. 솔로몬은 이 제도를 자신의 건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활용하였습니다.


(3) 해상교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다.


팔레스틴은 육상과 해상무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그 지역을 소유한 이스라엘이 교역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이스라엘을 전성기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영은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두로와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두로에서 성전 건립에 들어가는 백향목과 전나무를 수입하면서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두로의 왕 히람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통하는 이스라엘의 항구도시 에시온 게벨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히람 왕은 솔로몬 왕과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 성전 건립을 후원하는 대신 예루살렘을 통과해 홍해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4) 무역 공조를 통해 최고의 부와 명성을 쌓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남부 아카바 만의 에시온 게벨 부근에 에일랏(Eilat)에도 해상무역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인근 지방은 물론 장거리 무역을 크게 번성시켜 상업적 번영기를 가져왔습니다.

여왕이 통치하는 시바 왕국과 몰약, 유약과 향신료 등을 거래했고, 동부 아프리카와는 해상 선단을 운용하면서 희귀동물과 새, 백단향, 상아, 금 등을 취급했습니다. 해상무역 탐험대는 지중해와 인도양은 물론 당시에 알려진 세계 끝인 중국까지 항해했습니다. 오피르와의 교역도 활발했습니다. 오피르는 인도 해안지역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대 무역은 사무역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조공무역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무역’이란 상호 이익을 위해 양 당사자가 전보다 더 부자가 되리라는 점을 예상하고 행하는 거래로 솔로몬 왕은 부의 축적을 위해 이를 적극 추진했습니다. 이로써 해상권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5) 역사상 최초의 군수품 중계무역.


솔로몬 왕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요새화해 새로운 군사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넓은 평야에서 군마를 훈련 시켰습니다. 솔로몬이 운영한 병거대와 기병대에서 전차부대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자 최강의 부대였습니다.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함으로 인해 주변국들이 이스라엘 정책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이익 여부에 관계없이 조공무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수품 장사에 활용해 큰돈을 벌었습니다. 솔로몬은 길리기아 말(馬)을 사들여 군마로 훈련 시킨 뒤 이집트에 팔고 그 대금으로 이집트의 전차를 사들였습니다. 전차에 훈련된 군마를 묶어 북쪽에 있는 왕들에게 팔고 그 대금으로 다시 말을 사들였습니다. 그 시기에 군수품 중계무역을 한 것으로, 이후 중계무역은 유대인 특유의 장기가 됩니다.


(6) 부의 증대가 부패를 만연시키다.


무역으로 벌어드린 돈을 솔로몬 왕은 왕국의 수도 건설에 쏟아부어 20년 만에 성전과 궁전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국고가 바닥나면서 두로의 히람 왕에게 빚 대신 갈릴리 산악지대 20여 개의 촌락을 통째로 넘겨주었습니다. 히람 왕의 입장에서는 한 마디로 불성실 교역이었습니다. 각 지역에 건축한 요새도 유지비용이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통치 아래에서 페니키아인들과 북쪽 이스라엘인들은 노예로 전락해 갔습니다. 솔로몬 왕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재자가 되어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그는 모자라는 국고를 중과세와 강제노동으로 충당했습니다.

사회 구조의 심각한 계층 분리와 함께 솔로몬 왕은 미래에 닥칠 종교적 불협화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시행되고 있었고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신부가 무역을 성사시킨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주변 왕국의 많은 딸들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무역은 확장되었지만, 종교적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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