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에세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어느 손에도 우산이 들려 있지 않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떨어지는 속도가 잦아진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빨라지지 않고, 피할 곳도 찾지 않는다. 비가 떨어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빗방울이 맞닿는 땅을 한 번 내려다보며 흥얼거리던, 리듬에 맞춰 걷던 그런 십 대의 아이였던 내가 눈 떠보니 반려동물 한 마리와 동거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마흔이 되어 있었다.
학교 건물에 들어서며 락커를 찾아 카디건 하나를 꺼내 입는다. 텍사스의 8월은 너무 덥지만, 건물 안은 너무나 춥다. 복도를 걷다 보니 누군가 나에게 “췬나!”라고 외쳤고, 난 바로 쳐다보며 “노! 아임 코리안!”이라 외쳤다. 그래도 나름 한국에서 영어 100점을 맞던, 알파벳도 알고 문장도 만들 줄 알아, 물론 발음은 너희가 아직 못 알아듣지만, ‘나 미국 방금 막 왔다고. 하지만 너희는 한국말 알아? ㄱㄴ이라도 알아? 알아도 내가 더 알아.’라는 생각으로 돌아보면, 엄청난 자신감과 기죽음 없던 또 다른 십 대의 청소년이었던 내가 눈 떠보니 마흔이 되어 있었다. 이곳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집 하나 없이.
* 췬나: 미국인들이 아시아를 지금처럼 잘 알지 못해서 가장 잘 알려진 중국 China를 자기내식으로 발음하며 놀리듯 부르던 말.
수업이 끝나고 학교 정문을 나서는데, 한국인 오빠 한 명과 언니 한 명이 나란히 서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국에서 패션스쿨 입학을 위해 LA에 막 왔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또 약간은 내성적으로 보였다. 수업 중간중간에 눈이 몇 번 마주쳤는데, 마치 먼저 말 좀 걸어달라는 것만 같았다.(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저기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무슨 서베이(설문조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그저 “후에 클래스 없으시면 저희 아파트 가서 짜파게티나 같이 먹을래요?”
그냥 말 시키고 놀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낯가림 1도 없이, 아무에게 의도나 큰 목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말을 걸 수 있던 갓 20대가 되었던 그때의 내가 눈 떠보니 너무 낯을 안 가리면 상대가 불편할 수도 있겠구나를 서른 초반쯤 깨달아 약간은 심심해진 마흔이 되어 있었다.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말도 못 하던 갓난아기일 때 엄마를 바라보며 했던 생각도 기억이 나고, 나를 괴롭히던 남자아이 때문에 유치원 졸업 직전 부모님께 떼를 써서 꾸준히 다니다가 마지막에 졸업을 못 하고 그만두었는데 그 남자아이를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나고, 3학년 때 모두가 피한 남자아이를 상대해 주니 선생님이 짝꿍을 시키고, 국민학교 6학년 때 갓 초등학교로 바뀌어 난 초등학교 졸업 세대라며 떠들던, 1반부터 10반까지 친구의 친구까지 인사하고 다니며 넘치던 에너지를 풀어헤치고 다니던 그런 내가 정말 이제 마흔이라니.
돌아보면 정말 진심으로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겁이 없었고, 싫고 좋음이 분명했지만 대다수가 좋았고
싫은 게 별로 없었던. 선택의 폭이 넓었고 항상 기회가 넘쳐나 좁아질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원하는 대로 삶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망설임 없이 신념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던. 도전이 일상이었고, 변화를 오히려 즐기며 미래지향적으로 꿈을 향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던.
돌아보면 결핍이 부족해서 요령이 부족했고, 지혜로움보다 진실이 중요해서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던. 미련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앞만 보고 달렸던. 후회를 안 하는 성격이라는 프레임에 속아 회고도 부족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던. 그러면서도 일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애매한 포지션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했던.
언제 싹이 나나 싶었는데, 어느새 농익지 못하던 열매가 철을 맞아 언제 최고점으로 익어버렸던지도 깨닫지 못한 채 눈 떠보니 이전과 다른 마흔이 되어 예전보다는 조금은 재미가 없어진 것 같지만,
그래도 나의 갓난쟁이,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가 모두 담긴 어제보다는 아니지만 내일보단 여전히 뜨거운 지금의 내가 “가장 좋은 마흔.”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기록해 보려 한다.
슬쩍 비슷한 뒤따라오는 친구들에게 일말의 나눔이 된다면 그것 또한 너무나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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