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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마시되, 깊이 마신다 —일본 술잔에 담긴 이야기

by 다다미 위 해설자

도쿄에서 처음으로 사케건배!”라는 말도 작았다.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술을 따랐지만, 나는 멍하니 잔만 들고 있었다.


‘어... 마시면 되는 건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알았다.

이곳에선, 술이 말이 아니라 ‘침묵의 언어’라는 것.



일본의 전통술, 사케(酒).

쌀과 물, 그리고 누룩으로 빚어진 이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눈 오는 날,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사케는

‘지금 이 계절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

입 안에 맴도는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말없이 잔을 나누는 사람들.


그 고요한 술잔 너머에선

‘내 감정을 감추되,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흘렀다.



한국에서 회식은 다 함께 웃고, 떠들고,

술잔을 돌리며 친해지는 자리다.


하지만 일본의 술자리는 좀 다르다.


잔은 돌지 않는다.

술은 조용히 따른다.

누구도 취한 티를 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오히려 사람의 속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침묵을 얼마나 편안하게 나누는가.

잔이 비었을 때, 누가 먼저 채워주는가.

고요한 술자리 안에서,

사람을 읽는 법을 배운다.



가고시마 지방의 쇼추(焼酎)를 처음 마셨을 땐

그 진한 고구마 향에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우와, 쎄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일본인은 조용히 마시고, 조용히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이 술은, 기분을 내기 위한 술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술이라는 걸.


쓴맛도 말없이 삼키고,

속이 울컥해도 조용히 숨을 고르는 것.

그게 일본 술의 미덕이었다.



한국에선 술이 말을 풀게 한다.

속 얘기를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술은 감정을 꺼내는 매개체다.


하지만 일본에선,

술이 감정을 눌러준다.

술은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에 가깝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나라의 술자리만 봐도 그 사회의 속성이 보인다.



도쿄의 한 선술집,

작은 나무 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인 사케잔.

그 잔을 마시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조용했고, 낯설었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말없이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

감정을 숨긴 채, 예의를 남기는 사람들.

그들이 마시는 술은 결국, 삶을 버티는 한 모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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