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12화. 쌍벽

두 명의 친구 간 선의의 대결과 인생 스토리와의 관계를 소설화

by 벽운

雙璧


김씨와 백씨는 오랜 친구지간이다. 말이 친구이지 남이기도 적이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서로가 필요하고 없으면 입술 없는 이빨처럼 시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찾지도 않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저절로 자동적으로 만나게 된다. 일 년에 서너 번씩 토라져있다가 계절풍이 불어오면 바람의 권유에 의해 손을 잡는다.

나는 김씨와 백씨 모두를 잘 알고 있다. 성격과 심리는 물론 굴곡진 인생의 나이테도 그렇다. 그렇다고 만남을 주선하거나 관계를 조율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만나게 되어 내가 관전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기 때문이다. 그 둘은 고수이자 타고난 전략가이다. 인생의 축소판에서 마음껏 자신들만의 기량을 선보이기도 한다.

김씨도 백씨도 머리 회전의 RPM은 엄청나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렇다고 인생만사에 그렇지는 않고 치열한 수싸움에서만 그렇다. 그 둘은 인생의 광장에서는 그 명석한 두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지 영광의 왕관을 쓰지를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 둘은 속되지를 않았고 고상했다.


김씨의 머리는 천재 수준인데도 공부를 일부러 하지 않았고 세상의 절반 이상을 미워하며 살아왔다. 신고 있는 구두를 한 번도 닦은 적도 없는 자연주의자이니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였다. 남의 이목도 세상의 평가도 아예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였다.

그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스스로 자유라고 일컫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자신보다 한참 모자라거나 도달할 수 없는 도의 경지에 있는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장비의 불꽃과 여포의 만용과 조조의 꾀도 갖고 있지만 현시대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낡은 유산만 보듬고 있다.

백씨는 김씨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머리가 좋았다. 그는 매사를 반복 학습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집념이 큰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몸의 자세가 낮아서 넘어질 리가 없고 아무리 눈뜨고 봐도 빈틈이 없는 안정된 스타일이다. 김씨는 말이 많은데 비해 백씨는 말을 아꼈고 그 귀중한 에너지를 응축하여 귀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둘이서 언쟁을 하면은 처음에는 김씨의 속사포에 밀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둔중한 곡사포로 승리를 하는 곰 같은 사람이다. 그의 표정은 평소에는 석고상처럼 표정이 없지만 기분이 좋으면 빙긋이 웃는 얼굴의 근육은 보배롭기만 하다. 성낼 때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좀 무시무시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성낼 자리에는 좀처럼 오지 않고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산할지 모른다.


나는 그 둘이 한 번씩 주먹다짐 없는 수싸움을 하는 걸 보기 좋아한다. 그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흥행의 요건이 갖추어져야만 하고, 스스로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건곤일척의 시간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 흥행은 언젠가는 일으켜야 하고 그 시기가 되면 홍보를 할 것이다. 우선 그 둘이 제일 자신 있으면서도 또 패배 시에는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게임이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고 피바람이 인다든가 주변을 공포에 떨게 하는 전투는 아닐 것이다. 전쟁은 맞지만 겉으로 피를 보이지 않고 안으로만 입는 상처는 있을 것이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내상은 클 것이며 치유하는 시간은 오래 걸릴 것이다.


어느 해 연말에 김씨와 백씨를 필두로 친구들이 함께 섬으로 여행을 갔다. 승합차 한대에 친구들이 탔고 김씨는 운전석 옆에 백씨는 뒷좌석에 앉았다. 출발하는 순간부터 서로는 기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낚시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 이야기도 나왔다. 고아원을 보면 마음이 안되었느니, 우리 모두 다 책임이 있다는 둥 엉뚱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 점에서는 나와 김씨는 동의했지만 백씨는 무슨 뜻인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낚시 이야기가 나오자 나와 백씨는 귀를 쫑긋 세웠지만 김씨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런데 그 낚시가 변질하여 청춘의 낭만과 연결되자 김씨는 펄떡거렸다. 형이상학에서는 김씨는 무감각했고 형이하학에서 백씨 역시 무반응이었다.

섬에서의 낮 시간은 유익했고 밤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즐겼지만 어쩐 일인지 김씨와 백씨는 술잔에 입만 맞추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사업을 앞둔 기업가처럼 전장에 출전하는 장수처럼 몸과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고 있었다. 김씨와 백씨가 어느 외나무다리에서 결투를 하려고 한다는 소문은 얼마 전부터 들려왔었다.


김씨와 백씨는 각자의 방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한 번씩 거울에다가 얼굴을 비추면서 체면을 걸기고 수도승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도 하였다. 메인스타디움인 로텐더홀에 두 선수가 입장하였고 관중들은 판돈을 걸고 각자가 응원하는 선수의 뒤편에 섰다. 두 선수는 관중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시곗바늘이 9시에 도착하면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드디어 벨이 울렸고 두 선수는 각자 특유의 자세를 잡고 있었다. 초반은 서로가 신중하여 탐색전이었다. 먼저 김씨가 백씨의 좌변으로 시험 삼아 한방을 날려보았다. 백씨도 역시 우변 쪽으로 한 점을 꽂았다. 그렇게 정석적인 수순으로 포석을 하였다. 초반전은 발 빠르게 진행되다가 어느 지점에서부터 극심한 정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국은 중반전으로 접어들어 갔고 혼전이 계속되었다. 김씨는 백씨의 귀퉁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양쪽 귀퉁이에 한두 방씩 날렸고 백씨가 휘청거리기도 하였다. 백씨는 변방보다는 중앙의 코를 예리하게 집중 공략하고 있었다.

“삼국지에는 중원을 장악해야 이긴다는데. 김씨는 변방을 노리고 있구만.”

“변방을 빼앗기면 근본이 흔들리지. 안정되게 하려는 것 같기도.....”

“역시 백씨는 중원으로 뛰어드네. 승부를 걸은 모양일세.”

“아마 두 선수 모두 인생살이의 모습 같기도 한데 좀 난해하구만.”

두 선수는 헛방을 몇 번씩이나 날렸기에 총알을 아껴야 했다. 관중들은 승부수를 띄우기를 바랐지만 선수들은 아랑곳이 없었다. 두 선수의 운명이 걸린 싸움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이제 열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김씨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전매특허인 발장단이 아직 안 보인다. 김씨는 한 번씩 목을 쭉 뺏다가 밀어 넣기를 반복하며 묘수를 찾기에 바쁘다.

백씨는 한 번씩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란 듯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는다. 그는 독 안에 든 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간 독 안에 밀어 넣긴 하였지만 예리한 이빨에 물려 놓친 적이 많았다. 그는 가두리 안에서 서서히 그물을 당기기 시작하였다. 백씨는 코너가 아닌 링 중간에서 싸우고 있었다. 반면 김씨는 코너 부근에서 안전한 요새를 꾸리며 대응하고 있었다.

나는 관중들의 이야기 속에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김씨는 웅크려 있다가 덮치는 전략으로 나가고 있었다. 백씨 역시 중원에서 백마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김씨는 뚝심만 믿고 막바로 뛰어들었다가 세상으로부터 한방 먹은 경험이 있었다. 그는 폭풍우에 거친 파도가 다가올 때 정면으로 맞서야지 피하려다가 측면을 맞으면 침몰한다는 것을 바다에서 배웠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도사리고 있는 함정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허허벌판의 중앙에 세워져서 실컷 세상의 주먹을 두들겨 맞아 침몰해 버렸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세상의 처세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코너에서 방어선을 치고 중원으로 나가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게 되었다.

백씨 역시 아픈 과거가 있었다. 첫 사업을 하면서 중앙과 변방 모두에 골고루 신경을 썼다. 이론상으로 틀림없는 경영방향이었다. 현실은 잘난 놈들이 중앙무대에서 로비를 하니까 그에게 기회는 돌아오지를 않았다. 정직과 겸손은 타락한 업계에서는 먹히지를 않았다. 세상은 정의가 아닌 실리의 편에 가까웠다. 그는 기회는 쪼그려 앉아서 기다릴게 아니라 일어서서 마중 나가야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지금 중원으로 말을 몰고 진격하는 것이었다.


김씨는 본래 직진형이었고 백씨는 우회형이거나 진지 구축형이었다. 내가 한때 가운데서 나선적이 있었지만 손사래를 쳤다. 그만큼 둘 다 귀를 막고 방향 지시등을 무시한 채 자가발전만 하고 있었다.

김씨는 스스로 설계하고 장식한 범선에 희망을 품은 돛을 올려 큰 바다로 나아갔다. 그 넓은 광장에서 마음껏 포부를 펼쳐보려고 하였다.

백씨는 스스로 만든 경무장한 장갑차를 타고 적진을 탐색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기득권의 성벽은 두텁고 높았지만 끈기로써 싸워보기로 하였다.


이제 두 선수는 장고를 끝내고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변방에 진을 치고 머물고 있던 김씨가 조심스럽게 중원으로 진입하려고 흑돌을 한 점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사업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에 실패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곧장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았던가. 망설이는 것이 바로 실책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의 악몽이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흑돌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얼마간을 망설였다. 이 한 점이 그에게는 승부수였고 또 실패를 맛보게 하는 실착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조용히 손을 훅으로 휘두르며 그곳에 놓았다.


나는 김씨가 아주 신중하게 중원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는 지금 만용을 부리는 게 아니고 과거를 반추하며 신중한 한수를 구사한 것이라고 믿었다. 조금 있으니까 백씨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고 좌우로 목을 몇 번 돌리는 게 아니던가. 김씨는 백씨의 표정과 당황하는 장면을 보고 내심으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김씨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는 상황이 잘 풀릴 때 하는 습관인 발장단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그 동작은 자신감과 승부의 확신에서 오는 신호였기에 그랬다. 내가 보고 있는 판세는 김씨에게 유리한 게 아닌데 혹시 상대를 오판하게 하려는 심리전 같기도 하였다.


백씨는 김씨가 중원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 듯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별다른 묘수도 아닌데 득의양양하는 김씨의 자세에 혼란이 오고 말았다. 그는 김씨가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장고에 들어갔다. 계속해서 김씨의 발장단은 이어졌고 백씨는 백돌 한 점을 손가락에 끼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에게 지난 과거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상대가 공격해 오는 게 두려워서 슬며시 변방으로 물러나서 그 사업의 판을 넘겨준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그는 시험대에 선 것이고 그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남의 발장단에 꼬여서 자신만의 리듬을 잃어버린 적이 많았기에 망설였다. 상대방의 응수가 혼란을 불러일으키려는 계책이라고 생각하였던지 슬며시 양귀퉁이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망설임에서 벗어나 백돌 한 점을 뽑아내어서 송곳처럼 예리하게 그 점에 콕 찔러 넣었다.


두 선수의 안목은 넓었고 미래를 내다보는 수도 깊었다. 그런데 보고 있는 관중들은 그 수를 읽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이제 열 시 반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바둑판의 돌은 많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프로기사들의 대국장면을 보는 듯하였다. 나는 심판은 아니지만 한 번씩 재촉하는 말을 하였다.

“이러다가 날 다 새겠네.”

“혼전 중인데 누구는 승리의 스텝을 밟고 있으니 헷갈리기도 하네.”

김씨는 여전히 발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백씨는 그 소리가 좀 귀에 거슬리는지 말은 못 하고 하품만 하고 있었다. 아마 산소가 부족한 연못의 붕어가 공중에다 입을 벌리듯이 말이다. 예전에 백씨가 담배를 끊기 전에는 김씨에 대한 승률이 많이 높았다. 지금 백씨는 건강상 금연을 한 상태인지라 그런 전략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과거에 대국장면을 지켜볼 때 재미있는 모습이 많았다. 김씨가 발장단으로 신경을 건드리고 한 번씩 말로써 페이스를 흔들 때가 있었다. 그것은 판세가 김씨한테 불리하게 전개될 때 그랬다. 그러면 백씨는 담배를 한 개비 불에 붙여 그 연기를 옆으로 보내지 않고 모른 척하며 김씨의 얼굴에다 퍼붓는 것이었다. 담배를 못 피워 연기에 민감한 김씨는 너구리가 굴에서 뛰쳐나오듯 혼비백산했다.


관중들의 재촉으로 이제 바둑은 발걸음이 훨씬 빨라져 빠르게 공백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전체 면적의 2/3를 채웠으니 대충 승부의 그림이 그려질 만한데 초보들로써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보니까 김씨가 조금 밀리는 것 같은데 그의 표정은 여유가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승부처에서 이기고 있다는 징조 같기도 하였다. 김씨는 이제 발장단에 이어 이상한 선문답을 내놓고 있었다.

“지금 수싸움을 하고 있는 건가.”하고 내가 관전평을 하였다.

“허허, 지금 수싸움이 아니고 소싸움일세.”하고 김씨가 싱겁운듯하면서도 엄숙히 말했다.

김씨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이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 그 둘은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들은 몰랐다. 백씨는 백돌을 손가락 끝에서 요리조리 돌리면서 고개도 갸웃거렸다. 김씨는 여전히 발을 놀리고 입도 놀리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수싸움이 아닌 소싸움이 벌어진 게 맞았다.


김씨가 여유인지 작전인지 돌을 내려놓고 허리를 젖혔다. 판을 흔들기 위해 심리전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약간 빈정거리면서 말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한다.

“넌 아직도 안전한 길만 고르는군.”

백씨는 대답 대신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흰 돌이 천천히 빙빙 돌았다.

“안전한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을 길을 고르는 거지.”

백씨는 김씨의 얼굴을 피하면서 낮게 말했다.

“무너지지 않는 길이라고, 허이구.”

김씨가 특유의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살아서 어디까지 가겠어. 세상은 밀어붙이는 놈이 먹는 거야.”

백씨는 고개를 들어 김씨의 얼굴을 면도날처럼 째려보았다.

“그래서 네가 함 먹어 보기나 했어?”

방 안이 잠시 살벌하리만치 고요해졌다. 관중 중 누군가 헛기침을 삼켰다. 김씨의 눈빛이 싸늘게 번쩍였다.

“난 너처럼 적어도 치사하게 도망치진 않았어.”

그 소리에 백씨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난 도망친 적은 없지. 너처럼 미련하게 낭떠러지로 뛰어드는 걸 따라가지 않았을 뿐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중앙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김씨는 말발이 약하던지 다시 발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넌 그 버릇 못 버리고 아직도 변방을 맴도는 거고.”

그 소리에 백씨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보란 듯이 흰 돌을 중원 깊숙이 푹 찔러 넣었다.

“변방에서 중앙을 무너뜨리는 법도 있지. 이게 네 눈에 보이기나 하나.”

김씨가 흑돌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식어갔다.

“그때 말이야. 그 계약, 네가 한 발짝만 앞으로 나왔어도 챙기는 거였어.”

김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바둑판보다 더 단단했다.

백씨의 눈썹이 움츠러들었다. 과거, 결정적인 계약 앞에서 환멸을 느끼고 물러났던 그의 아픈 구석을 김씨가 찔러버린 것이다.


김씨와 백씨의 싸움은 바둑판에서만 아니라 장외에서도 이어졌다. 백씨는 김씨의 빈정거림을 이겨낼 수 있는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맞불을 놓으려 하니 김씨의 현란한 말놀림은 아지랑이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바둑을 이긴 날에는 말놀림 그 자체였지만 진 날에는 비수였다. 바둑판에서는 발장단에 괴로웠고 장외에서는 말놀림에 처절했다. 그 혐오의 마그마는 에너지를 응축하며 임계점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그 분노의 용암은 항상 부글거리며 서로를 밀어내기도 당기기도 하였다.

“그럼 너는... 계산 빠른 너도 자빠졌잖아.”

백씨가 돌을 굴리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김씨의 발장단이 브레이크가 걸린 듯이 갑자기 멈추었다.

계산? 나는 그게 낭떠러지인줄 몰랐지.”

김씨의 입가가 균형을 잃고 대각선으로 반쯤 비틀렸다. 백씨도 보란 듯이 김씨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때 바둑판 위의 중앙이 갑자기 넓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정면에서 부딪혔다. 그리고 김씨가 돌을 들어 중원에 내려놓았다. 소리는 작았지만 그날 밤 가장 큰 파열음이었다. 상대가 감당하기가 힘든 묵직한 회심의 한 수였다.

백씨는 또 한 번 경기에 걸린 듯이 깜짝 놀랐다. 그 패를 받아줄 묘수를 찾아서 두어야만 했다. 막판으로 치닫고 있기에 그런 반상 최대의 점을 찾기가 쉽지를 않은 듯하였다. 그렇다고 백기투항도 할 수가 없었다. 김씨의 빈정거림을 참을 수는 있지만 지고 싶지는 않았다. 또 이상한 꼼수를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시간을 보내며 과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백씨는 사업을 할 때 끝까지 버티지 않고 경쟁회사가 치사하다고 하여 양보한 적이 많았다. 그들은 뒷돈을 기다리고 있는 듯 줄듯 말 듯 애를 태웠다. 그 당시에 약간의 파우치를 준비했더라면 큰 계약을 따낼 수도 있었다. 그는 혼탁한 사업판에 환멸감이 들어 양보해 버린 적이 많았다. 자신의 패를 다 보여주지 않고 연막을 치면서 상대가 겁먹고 물러나게 하는 심리전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후회를 하곤 했다.

김씨는 바둑판에서만은 백씨를 이기고 싶었다. 다른 게임에서는 명함도 못 내놓을 정도이다 보니 모든 수를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발장단도 입놀림도 상처 건드리기도 다 그런 수였다. 김씨는 백씨의 침묵이 자신을 무시하는 외면으로 보였다. 그는 눈치가 빠른 건지 스스로 자가발전인지 한 번씩 침묵의 무례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말놀림에 휘말리지 않고 바람처럼 피해 가는 지독한 무대응에 좌절하였다. 그래서 그는 온갖 변칙으로 바둑판에서만은 이겨 무시당한 자존심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백씨는 묘수가 생각나지를 않았다. 만약 패를 걸 때가 없으면 돌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던지기에는 지금껏 판세를 잘 경영해오고 있지를 않았던가. 그는 순간적으로 과거의 역전사례를 더듬어서 보았다. 한 번씩 등잔밑이 어둡다는 것을 알았고 보통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는 상대방의 치명적인 허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머물렀던 동업계 사장이 기사회생한 사례가 떠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서 비켜나서 멀리 떨어져서 보라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백씨는 잠시 허리를 편다는 핑계로 천천히 자리에 일어서서 높은 곳에서 바둑판을 매의 눈으로 내려 보았다. 그때 김씨의 바로 코밑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균열된 성벽이 보였다. 이미 자신의 돌이 침입한 상태로 백돌 한 점을 쌍립을 하면 대마를 잡던지 생존할 수 있는 묘수가 있었다. 장고 끝의 악수가 아닌 승부수였다.

김씨는 갑자기 낭심을 잡힌 듯 화들짝 놀랐다. 정말 자기의 코밑에 있는 허점을 미리 알지를 못했는 모양이었다. 그는 패를 받아주어야 했고 다른 팻감을 찾아야 했다. 그의 발장단은 멈추었고 얼굴에는 약간의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더니 조금 전과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황당하기도 하다는 모습 같았다. 그가 방심하여 그간 유지해 오던 선수를 빼앗겨 자초한 형국이었다.

이제 김씨가 초읽기에 몰렸고 백씨는 만패불청이라고 선포하면 승부는 그것으로 끝날 수 있었다. 백씨는 물 잔을 들어 여유 있게 마시면서 나한테 씽긋이 웃음을 보내왔다. 또 경직된 어깨를 풀려는 듯 목을 좌우로 몇 번을 돌렸다. 행운의 여신이 그를 포옹하는 듯했다.


김씨는 이제 그 패를 포기하고 바둑알을 계산하고 있는 듯하였다. 실리를 챙겨서 계가 바둑으로 몰고 가려는 전략이었던지 백씨가 구축해 놓은 귀퉁이 중간에 큰 원을 그리며 흑돌을 한방 치중하였다. 두 집이 되지 않으면 지는 바둑의 정석을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예의를 무시한 무리수처럼 보였다.

백씨는 김씨의 돌발적인 침입에 화들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 자신도 코밑의 등잔불 밑이 어두운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그곳을 지게 되면 피 터지는 계가 바둑이 되고 다 잡았다고 하는 패싸움이 무색해지는 것이었다. 다시 김씨의 발장단이 쿵작거리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또 수싸움이 아니고 소싸움이라고 하는 선문답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제 11시를 넘었고 관중들도 지쳤는지 관중석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었다.


나는 그 치열하고 양보 없는 수싸움을 보고 역시 그들만의 리그를 인정하였다. 그 둘은 오랜 친구이지만 항상 적으로 살다시피 하였다. 그렇다고 주먹이 오가는 몸싸움은 아니었고 오직 기싸움이었다. 그것은 평행선을 달리는 열차처럼 정면충돌은 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교행하였다. 멀리서 서로 경적을 올리면서 다가오다가 아찔한 극한의 상황을 맛보면서 등을 보이며 지나쳐갔다.

김씨는 다변이었고 말이 원색적이어 백씨는 말의 포위망에 갇혀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았다. 김씨는 백씨가 열받아서 곧장 품위 잃은 응수를 보내오기를 음흉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백씨는 김씨의 무례한 응수타진을 철저하게 외면하여 김씨가 김이 팍 새 버리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다. 백씨는 그 엉거주춤한 틈을 타서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 성동격서의 전법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한 번은 김씨가 이겼고 한번은 백씨가 웃었다. 이긴 날에는 각자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득의양양하였기에 서로는 패배하는 날에 우울하였다. 그러니까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절차탁마하면서 바둑알을 매일 매만졌다. 그 둘은 겉으로는 앙숙이었지만 서로가 없으면 재미를 끌어당길 수 없는 지남철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다. 그 둘 중 누군가가 은근히 한 수 하자는 소식을 끼니처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 반상은 신선의 놀이터였고 물질에 포박된 영혼을 해방시켜 주었다. 돌아가면서 승리할 때는 물질과의 전쟁에서 입은 상흔을 쓰다듬어 주었고 인생승리자의 개념을 재정의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바둑판의 패배는 불면의 밤이 되기에 충분하였기에 마지막까지 생존의 정글을 헤쳐 나가는 탐험가와 같았다.

밤 11시, 실내의 공기는 두 사람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김씨의 셔츠 등줄기는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의자에 달라붙었다. 백씨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이미 다 비워버린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관중들의 코골이 소리마저 숨을 죽인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정중앙에서 불꽃 튀게 맞부딪혔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지기 직전의 찰나, 거짓말처럼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 갑자기 섬에서 정전이 발생하였고 무대는 어두컴컴하였다. 나는 비상용 촛불을 켜고 바둑판을 비추려고 하였다. 그 둘은 여전히 바둑알을 쥐고 있었고 어둠 속에도 수를 읽고 있었다. 촛불은 좁은 바둑판을 비출 수는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이 그려가고 있는 세상은 비출수는 없었다. 밤도 늦었고 준비해 둔 안주도 식어가니 판을 거두는 미덕이 필요할 때였다. 이미 두 사람은 바둑의 진수를 다 보여주었다. 이번 대국은 관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인생사를 반추해보게 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던 게 확실하였다.

“이건 하늘이 무승부라고 선포한 것이요.”

그때 누군가가 말하였다. 정전으로 인한 어둠으로 더 이상 둘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 낸 절묘한 휴전이었고 그 둘은 수용하여야만 했다. 결국 누가 몇 집을 남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국이 끝난 후 김씨의 낡은 구두는 조금 닦여 있었고, 백씨의 굳은 표정에는 처음으로 깊은 주름을 타고 웃음이 번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승부는 승자 없이 끝났지만 앞으로의 두 사람의 대국은 여전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각 선수들에게 태운 판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제법 큰돈이었고 다음 날 단란주점에 가서 써도 남을 만큼 충분하였다. 도로 돌려주려고 하니 김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돈을 고아원에 기부하면 어떨까 생각하네. 우리들의 지난날을 반성도 할 겸 말일세.”

“나는 고아원에 너희들 만큼 책임은 없지만 흔쾌히 동의하네.”하고 백씨가 말했다.

“책임이야 없다고 한들 고아원은 좀 애달픈 곳이 아니던가.”

“그간 친구들이 고아원에 자주 갔었는데 내가 좀 미안해지네. 당구대회 우승 상금을 보탤게.”하고 백씨가 한마디 정중하게 내놓았다. 백씨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신撞神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 김씨가 부러워하지만 올라설 수 없는 월계관이었다.


그 대국은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둑판 위에 남아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몫만큼 그것을 안고 돌아섰다. 두 선수는 꼼수가 이기는 사회 대신에 정석 만이 통하는 바둑판에서 세상을 일깨운 승리자들이라고 보였다. 물질이 정신을 능가하지 못하고, 성공은 세상이 판정해 주는 게 아닌 스스로의 믿음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둘은 서로 등을 맞대어 버티고 있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 벽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또 서로를 지탱해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었다. 우정은 항상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돌아 서서 있지만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대립도 한몫한다는 걸 알았다. 내년에도 이 섬에 와서 두 사람의 대국을 보고 싶었다.


그때 창문을 여니 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아름다운 장면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불 꺼진 게스트홈은 바다 위에 비친 달빛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그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바다는 끝없이 파도를 밀고 와서 백사장에서 달빛 아래 부서지고 있었다. 오늘도 해변의 몽돌밭은 잘그락거리면서 부딪혀 모난 서로의 귀퉁이를 다듬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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