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의 공간이 되어줄 수 있을까
*본 리뷰는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고요한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자리에 앉아 무대를 응시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여백'이다. 높이가 다른 단 두 개. 의자도 딱 두 개. 배경이 되는 스크린. 이게 전부다. 그렇다면 재현적 공간을 모두 배제한 이 공간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텍스트? 연출, 또는 배우... 아니, 다 거짓말. 사실 이 연극은 모두 거짓말이다.
첫 장면은 흥겹다. 온 배우가 등장해 막춤을 추듯 열정적으로 리듬을 타며 노래 하나에 몸을 맡기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은 이 장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힌트를 던져준다. 자, 이 작품은 거짓말로 가득할 거예요. 무엇이 진실인지는 관객들이 판단해야 해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귀에 들리는 것만 믿지 마시라고요.
신나는 노래방 타임이 끝날 무렵 '나'는 엄마에게 묻는다. 이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가 말한다. 내가 운이 좋았다고. 70년대 한국의 여성 택시 기사로 살아가던 엄마는 통금 시간을 앞두고 마지막 손님을 찾는다. 그때 엄마 눈에 딱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마마'다. 흰 스카프 때문일까. 금방 눈에 띈 마마는 대교 앞에 쭈그려 앉아 있다. 얼굴은 엉망. 꼭 누구한테 맞기라도 한 모양인데. 마마를 태운 엄마는 '집'을 향해 택시를 몬다.
화교로 자라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마마는 고향이라고 하는 중국으로 돌아갈까 싶다가도, 그곳이 진정 내 고향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아버지 가게를 물려받은 남편은 다정했지만,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고. 자꾸 거짓을 꾸며내는 친구 때문에 더욱 흔들리기도 한다. 그는 흔들리는 만큼 더 마마를 잡는다.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사는 마마는 돌아가고 싶다. 어디로? 고향... 그건 너무 어렵고. 당장 집에라도 가고 싶은데, 분명 마마에게 집은 '실재'하는 공간인데. 그곳은 진정 내 집이 아닌 것 같다. 마마의 집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마마는 자신을 발견해 준 택시 기사, '엄마'에게 제안 하나를 건넨다. 나를 정기적으로 태워 달라고. 하루에 3시간 정도? 체류증을 갱신하러 갈 때나, 마트에 갈 때면 자기를 태워 달라고.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처음엔 그 제안을 거절했던 엄마는 결국 마마를 태우고 다니며 유대감을 느낀다. 엄마는 사실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이 아이의 아빠는 없다. 그러니까 홀로 키워야 하는 아이인 것이다.
자신에게 자꾸 부양의 짐을 지우는 가족들로부터 멀리 도망친 엄마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택시 운전대를 잡기에 이른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은 엄마는 아이를, 그러니까 '나'를 지우기로 결심한다. 마마는 내가 키우겠다며 말려보지만, 엄마는 강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돈은 거짓말처럼 가족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엄마는 결국 나를 낳기로 결심하고, 그런 엄마에게 따뜻한 국을 먹이거나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모두 마마의 몫이었다. 1970년대 후반, 급격한 산업화 속 가장자리로 밀려난 여성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 극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단한 삶을 사는 여성들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과정을 천천히 그린다.
1막 끝에 다다르면, 예정된 결말이 펼쳐진다. 친구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남편은 결국 마마가 불륜을 저질렀다 굳게 믿고, 아주 잠깐 마마를 집으로 돌려보낸 엄마는 그 사이에 마마가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엄마를 두고, 다시 노래가 시작된다.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은 1970년대 고고 음악과 춤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극의 무게가 압도적으로 느껴질 때쯤,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잠시 숨을 고르게 해 준다. 그 잠깐의 '사이'를 취한 뒤 마주하는 장면은 그러나 혼란스럽기만 하다.
'다시 말하기'라고 해야 할까. 2막이 시작되고, 빈 무대 위에 홀로 등장하는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 엄마와 마마는 그렇게 만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남편은 늘 마마를 감시하고 싶어 했고, 친구는 감시인으로 제 동향인 '엄마'를 소개해 준다. 택시 기사로 일하는 엄마는, 마마가 밖으로 나갈 때면 차를 태워주는 동시에 마마를 감시해야 했다. 새롭게 쓰이는 과거 속 변치 않는 사실은 마마가 남편의 폭력 속에 살았다는 것과, 엄마는 가족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것. 그리고 남편은 마마를 의심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마마가 자신이 준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엄마는 그런 마마를 돕기 위해 반지를 찾아 나선다. 친구가 숨기고 있던 반지를 되찾으려 몸싸움을 하던 중 실수로 그를 죽여버린 엄마는 결국 형을 살게 되고, 이후 마마는 사라진다. 아주 소리 소문도 없이.
2막을 지켜보는 '나'의 서술로 진실은 더욱 미궁 속에 빠진다. 나는 마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는데, 나는 애초에 마마와 만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왜냐하면 마마는 엄마가 형을 살 때, 그곳에서 나를 낳았을 때,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이쯤 되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는다. 중요한 건, 그들의 이야기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아무 상관없다. 지금 이 무대에서 다시 말해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거지.
끝에 가서 나는 마마가 살았던 그 집을 찾아간다. 거기엔 이주 여성 '꾸엔'이 살고 있다. 사람을 죽인 남자와 결혼한 꾸엔은, 하루하루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놓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젠 이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내 자식의 집이 될 거라고 말하는 꾸엔의 목소리. 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장소가 되어주는 결말에까지 나아간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마지막 장면만이 진실이라 생각한다고. 그건 마마가 엄마에게 팔찌를 선물해 주는 장면이다. 마마와 엄마, 그리고 나에겐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름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삶을 살았으니까. 마지막에 가서야 슬쩍 드러나는 이름 하나가 있다면, 그건 '타오타오'. 한국어로는 '도망가다'는 뜻이다. 마마에게 타오 하나, 엄마에게 타오 하나. 타오타오. 결국 이 인물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이렇게 쥐여주는 희망의 말만이 진실이라는 작가의 말이 강한 울림을 준다.
거짓말은 때로 권력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진실을 다르게 표현하는 장치로 기능할 때도 있고. 거짓말이라는 큰 틀 아래,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이 극은 내가 살던 그 집엔 내가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장소가 되어 주었기에 살 수 있었다는 고백으로 끝나는 것 같다. 돌아가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쉬고 싶었던 그들은 이제 돌아가고, 도망치며, 쉼을 얻게 되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라고. 작은 소망을 내비치어 본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의 문화초대를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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