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복원

호메로스는 듣는 사람이었다

by 글을써현

읽는 사람은 없고 글 쓰는 사람만 넘친다는 관점의 글이나 기사를 볼 때면, 나는 늘 호메로스를 떠올린다. 서양 문학의 출발점이라 불리는 인물, 그러나 문맹이었다고 전해지는 시인. 문자로 시를 '쓰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문학의 기원이 되었을까?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묘한 역설을 남긴다. 글을 쓸 수 없던 사람이, 인류의 서사를 시작했다는 사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자를 다루는 재주보다 더 근원적인 능력이라는 뜻 아닐까. 인간은 오래전부터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 왔다. 언어 이전의 소리, 활자 이전의 리듬이 있었다.


어제 지하철에서 본 풍경이 자꾸 떠오른다. 여섯 명이 앉은 좌석에서, 다섯 명이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사진을 편집하고, 다른 사람은 짧은 영상을 빠르게 넘기고, 또 누군가는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했다. 모두가 무언가를 발신하거나 수신하는 중이었지만, 정작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동시에 발신자이면서, 수신 상태였다.


지금의 우리는 '기록된 것'에 너무 의지한다. 누가 무엇을 썼는지, 얼마나 읽혔는지, 어떤 매체에 실렸는지를 기준으로 이야기의 무게를 재단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호메로스의 낭송이 힘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뛰어난 화술을 가져서가 아니라, 청중이 제대로 들었기 때문이다.


귀 기울인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리듬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는 일이다. 문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침묵의 의미를 함께 견디고, 말 사이의 공백에서 진짜 이야기를 읽어내는 일이다. 호메로스의 시대에 이야기는 살아 있는 순간이었다. 낭송자는 청중의 눈빛으로 리듬을 조율했고, 청중은 그 반응으로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야기란 언제나 '함께 드는 숨'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플랫폼은 '청취'가 아닌 '반응'을 요구한다. 좋아요, 공유, 댓글 모두 즉각적 판단의 언어들이다. 우리는 상대의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답을 준비한다. 경청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무엇보다 측정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 많이 쓰면서도, 거의 듣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제는 듣지 않으면 쓸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진짜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깊은 경청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노래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전사들의 이야기를, 바다의 소리를, 신들의 숨결을 온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와 대화했고, 세계는 그에게 응답했다. 그 울림이 '일리아스'가 되었다.


나는 요즘 이런 연습을 한다. 하루에 하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 반박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의 문장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기. 상대가 말을 멈췄을 때도 조금 더 침묵을 견디기. 이상하게도, 그렇게 들은 뒤에야 내 안에서도 진짜 문장이 올라온다.


어제는 친구가 이직 고민을 털어놓았다. 평소 같으면 나는 곧바로 장단점을 나열하거나 비슷한 사례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저 들었다. 친구의 망설임, 두려움, 기대가 뒤섞인 긴 문장들을 온전히 받아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아." 나는 아무 조언도 하지 않았는데, 친구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이야기는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는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해는 언제나 듣기에서 시작된다. 결국 이야기는 문자의 형태를 빌릴 뿐, 그 기원은 몸의 기억 속에 있다. 목소리의 떨림, 숨의 길이, 침묵의 무게 이 모든 것이 글자보다 먼저 존재했다.


글쓰기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글이 아니라 더 깊은 듣기다. 호메로스가 가졌던 그 집중과 호흡처럼 눈앞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타인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그로부터 다시 말을 빚어내는 느린 감각 말이다.


오늘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마지막 문장까지, 침묵까지, 온전히.


*이 글은 1월 1일 SNS에 기재했던 단상을 확장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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