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본질과 이념적 편향 사이에서
문학은 태생적으로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장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부터 카프카의 '변신'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문학 작품들은 당대의 '당연함'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이는 정치적 진보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문학은 확립된 언어, 확립된 인식, 확립된 감각을 뒤흔든다.
보수든 진보든, 어떤 이념이 '정답'으로 굳어지는 순간 문학은 그마저 의심한다.
문학이 주변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 아니다. 중심에서 벗어난 시선이야말로 세계를 더 선명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볼드윈이 흑인 동성애자로서 쓴 문장들이 이성애자 독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의 특수한 경험이 오히려 인간 조건의 본질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소외된 자의 경험은 '정상'이라는 허구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사회가 자연스럽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실은 특정한 권력 관계의 산물임을 몸으로 증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문학이 '진보적 의제'를 다루는 것과, 그것이 살아있는 사유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안나 카레니나'가 위대한 이유는 여성 해방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안나라는 한 인간의 내밀한 갈등을 통해 사랑과 자유, 사회적 규범이 실제로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소수자는 선하다', '기존 질서는 억압적이다'라는 전제만 반복하는 작품은 아무리 '올바른' 메시지를 담고 있어도 문학으로서는 실패한다. 맥락(소수자의 경험)은 있지만 사유(그 경험이 인간 조건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가)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적 불편함은 단순히 '보수적 가치관'을 공격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진보적 이상주의자인 라스콜니코프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그 끔찍한 귀결을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전체주의를 비판하지만, 좌파 작가가 좌파 이념의 타락 가능성을 직시한 결과다.
문학이 진정으로 대담할 때는 '우리 편'의 전제마저 의심할 때다.
페미니즘 문학이라 해도, 여성 인물을 일방적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고 그들의 복잡한 욕망과 모순까지 포착할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문학계에 진보적 작가가 많은 것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살아남는 이유는 '이념적 올바름' 때문이 아니다. 본질에 다가서는 질문을 더 깊고 정직하게 던질 때, 작품은 시대를 넘어선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
그 질문 앞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은 너무나 조잡해진다.
다만 현실적으로 문학계나 출판계에서 특정 정치 성향의 편향된 시각이 드러날 때, 나는 그것을 문학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문학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본래의 속성 때문에 진보적 작가가 많다는 설명은 이론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이념의 독점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이 진정으로 질서를 의심한다면, 그 의심은 현재 문단을 지배하는 '정설'에도 향해야 한다. 만약 어떤 목소리는 환영받고 어떤 질문은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문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권력 구조일 뿐이다. 문학은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고, 자기 의심하며, 자신이 서 있는 토대마저 흔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적'이라는 수식어는 그저 또 하나의 권위가 될 뿐이다. 그리고 권위에 안주하는 순간, 그것이 보수든 진보든, 문학은 죽는다.
*SNS의 한 질문에서 출발해 문학과 정치 성향에 대해 사유한 글입니다.